밤새 꽃잎이 내려앉은 자동차가 도로를 달린다. 미처 떨궈내지 못한 이슬이 마를 때마다 하나둘 꽃잎이 떨어졌다. 연분홍 여린 발자국을 남기며 가는 자동차 덕분에 잿빛 도시에도 잠시 낭만이 스몄다. 차창에도 가득 앉은 저 분홍색 꽃무더기가 운전자는 성가셨을까, 아니면 흩어지는 게 내심 아쉬웠을까 궁금한 봄날이었다.
4월의 끝자락, 높은 나무에서 핑크색을 뿌려주던 벚꽃은 스르륵 사라지고 고운 화초들이 길가에 심어졌다. 바삐 움직이던 출근길 발걸음이 잠깐 멈추더니 고개를 숙여 꽃 냄새를 맡았다. 총총거리던 아침 풍경에 짧은 쉼표. 허리를 굽혀 꽃과 가까워지던 한 사람 덕분에 순간 주위가 행복해졌다.
조그만 더 오래 꽃을 보고픈 마음은 저 먼 스페인 안달루시아로 날아갔다. 안달루시아만큼 찬란한 봄의 정서가 어울리는 지역이 또 있을까? 모두가 플라멩코 전통의상을 입고 몰려나와 춤추고 노래하는 세비야의 '4월 축제(Feria de Abril)'가 끝나고 나면, 골목마다 벽마다 꽃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코르도바의 '파티오 축제(Fiesta de los Patios)'가 시작이다. 불타는 것처럼 강렬한 빨강, 대놓고 선명한 노랑, 사람들 옷에서부터 도시를 가득 채운 꽃들까지 무채색 따위는 저리 가라고 소리를 친다. 오감을 자극하는 향기와 색깔 터져나갈 듯한 생명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 안뜰인 파티오(Patio)는 천 년 전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던 이슬람 왕조가 남긴 건축문화다. 지붕이 없으니 집 안은 아니지만 또 벽이 있으니 집 밖도 아닌 독특한 공간. 돌이나 타일로 바닥도 깔고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도 놓고 편히 앉을 야외 소파까지 마련해 둔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휴식처다. 유럽 대륙에서도 제일 아래쪽, 아프리카와 맞닿아 있는 지역이라 뜨거운 햇살을 피할 그늘을 만들려고 사방으로 돌담을 쌓으니, 평소에는 창살대문 사이로만 슬쩍 넘보는 비밀의 정원이다.
이 내밀한 공간이 활짝 열리는 때가 바로 '파티오 축제'다. 집집마다 공들여 키운 꽃들로 파티오를 장식하고는 밀려드는 손님을 맞이하는데, 놓을 공간만 있으면 모두 화분으로 채우는 건 기본. 그것도 모자라 빈 벽이며 창문틀까지 온통 꽃들의 차지다. 축제 마지막 날이면 1등부터 8등까지 가장 아름다운 파티오를 뽑는 전통이 벌써 102년째, 해마다 열리는 축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다. 그러니 상금도 상금이지만 코르도바 최고의 파티오로 꼽혔다는 명예 자체가 집주인들에게는 소중하다. 자랑하는 게 높은 빌딩이나 대단한 은행예금 잔고가 아니라 '고작' 꽃이라 참 좋았다.
꽃이 피어 세상이 아름다워질 때, 흩날리는 꽃잎들이 무색한 시공간도 있었음을 안다. 가뭄으로 굶주린 토끼 떼가 농장을 습격하는 이상기후에다, 내전이 확대된 수단에서는 목숨을 건 탈출이 진행 중이고, 1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매연 가득한 도시에도 꽃잎을 얹은 차가 도로를 달리는 짧지만 아름다운 나날이 있었다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과 꽃으로만 채운 서로의 정원을 공유하며 만끽한 봄날이 있었다는 것을 새겨두려고 한다. 언제나 어두운 시절을 견디게 만드는 건 밝은 날의 기억 한 조각. 세상에 유난히도 봄 축제가 많은 이유는 생명이 숨죽인 겨울을 보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또 다른 의지의 표현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