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포와 연인들의 후예들

입력
2023.05.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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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레스보스 소송

“나 장담하건대, 언젠가 다른 시대 누군가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Someone, I tell you, in another time will remember us.)”

캐나다 시인 앤 카슨(Anne Carson)이 영어로 옮겨 2002년 출간한 ‘If Not, Winter’에 수록된, 시인 사포(Sappho)의 저 예언 같은 시구는, 2500년이 지난 지금 여성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레즈비언(lesbian)’이란 말과 더불어 기억을 넘어 신화의 한 형상이 됐다.

에게해의 그리스 섬 레스보스에서 태어난 사포는 고향에 사설 아카데미를 열어 여성 제자들과 연인처럼 어울리며 그들을 향한 정념과 질투의 감정을 여러 편의 서정시로 표현했다. 사포가 노래한 ‘우리’, 즉 레스보스 섬 에레소스 해변을 거닐며 사랑을 나누던 그들 ‘레즈비언’이 그들의 후예에 의해 성 지향을 가리키는 용어로 차용된 배경이 그러했다.

정교회 국가 그리스 시민 다수는, 사포나 플라톤의 시대와 달리 동성애를 금기시한다. 레스보스의 한 잡지 발행인 겸 보수활동가 드미트리스 람브루 등 시민 3명이 2008년 5월 1일 ‘그리스 게이 레즈비언 연합’이란 단체를 상대로 ‘레즈비언’ 용어 사용 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람브루는 “1924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레즈비언은 레스보스 섬 주민을 가리키는 단어로 소개됐다”며 “여성 동성애자들에 의해 도용당한 그 말을 되찾기로 했다”고 밝혔다.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은 소송이 동성애자 혐오의 한 방편이라며 반발했다. 소송을 기점으로 극우 보수단체들의 게이프라이드 행진 방해 등 공세가 악화했다.

아테네 법원은 7월 소송을 기각했다. 법원은 “레즈비언이 섬 주민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리스와 외국 동성애자 단체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며 원고 측에 피고 측 소송 비용 230유로를 대납하라고 판결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