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던' 집이 형체도 없이... 강릉 산불 전과 후

입력
2023.04.22 17:00
화염 휩쓴 강릉 펜션 단지 일대 잿더미
일터·삶터 한꺼번에 사라진 주민들 '망연자실'
고즈넉한 마을 모습은 지도 앱 거리뷰로만 남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실감하시나요?"

김혜란(47)씨는 잿더미로 변한 집터 앞에 서서 "허무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강릉 산불 발생 9일째인 지난 20일 피해가 가장 컸던 저동 펜션 단지를 찾았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펜션 단지의 모습은 이제 포털 지도 앱의 '거리뷰'에만 남아 있을 뿐,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 있었다.

특히 목재로 지은 펜션이나 단독주택들은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집 앞에 주차된 채 그대로 타버린 자동차의 잔해와 마당 앞에 백골로 남은 강아지 사체 등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김씨는 "옅게 보이던 연기가 마을 쪽으로 확산해 불바다를 이루기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며 "고3 아이 교복도, 교과서도, 아무것도 못 챙기고 입은 옷에 탈출하다시피 집은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19년째 이 자리에서 펜션을 운영 중인 그의 목조 건물 세 동은 이번 화재로 전소했다.


이재민 임시 대피소인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만난 안영순(61)씨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저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이 불에 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2000년 9월부터 저동 펜션단지에서 거주해 온 안씨는 여전히 현재 상황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불이 나던 그날 아침도 평소처럼 스트레칭을 마치고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천둥소리에 놀라 나와보니 이미 집 밖은 먹구름 같은 연기가 자욱했다. 천둥의 정체는 짚 앞 소나무 숲이 타면서 내는 소리였다. 불붙은 솔방울이 '도깨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관절염 약을 비롯해 상시 복용하는 약 몇 가지만 챙겨서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남편 이동하(61)씨는 주변이 '불바다'로 변할 때까지도 호스를 들고 지붕에 물을 뿌렸다. 안씨는 그런 남편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씨는 손과 어깨 등에 2도 화상을 입고 치료 중이다. 안씨는 "익숙한 집에서 먹고 자고 쉬는 평범한 일상이 회복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마음이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트럭을 몰며 계란을 판매하는 이씨는 대피소에서 화상 부위의 드레싱을 마친 뒤 서둘러 일터로 돌아갔다. 이들의 23년 된 목조주택은 이번 화재로 모두 탔다.


지난 18일 강릉시가 밝힌 1차 피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1명이 숨지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다. 축구장(0.714㏊) 530개에 달하는 면적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경포 일대 펜션과 민가 등 건축물 266동, 저온저장고 등 농업시설 122동이 전소 또는 반소 피해를 입었다. 217가구, 489명의 주민이 삶터를 잃고 강릉 아이스아레나와 인근 펜션 등 임시 주거시설에 머물고 있다.



강릉= 하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