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의 당선이 유력했을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탁상을 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이 자리에 앉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가엾은 아이크, 대통령 자리는 군사령관과는 전혀 달라. 아이크는 곧 이 자리가 심한 좌절감을 가져다 준다는 걸 알게 되겠지.”
대통령 리더십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대통령의 권력’(1960)에서 정치학자 리처드 뉴스타트가 전한 이야기다. 실제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오른 후 당과의 불화 등이 계속되자 참다못해 분통을 터트리곤 했다고 한다. 자신의 결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데 대해 충격을 받으면서. 대통령이 군 사령관보다 더 큰 권력을 부여받았지만 국정 운영은 군대와는 달랐던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통령 권력은 군사령관식의 명령이 아니라 설득력을 통해 발휘된다는 게 뉴스타트의 메시지다.
트루먼이 아이젠하워를 두고 한 말을 지금 여기에 적용하면 이런 명제가 가능하다. '대통령 자리는 검찰총장과 다르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이젠하워처럼 좌절감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권력이 검찰총장과 달리, 일방통행식 지시가 아니라 설득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직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게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는 윤 대통령의 4ㆍ19 기념사도 검찰총장의 언어에 가까웠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의 태를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출근길 ‘도어스테핑’(약식문답)이었다. 때로 정제되지 않은 답변으로 논란을 부르기도 했지만 기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전임 대통령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전향적인 소통 행보였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권력이 설득력에 달려 있다는 명제에서 보면 도어스테핑은 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권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를 가장 잘 활용했던 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의 도어스테핑 발언들이 다양한 찬반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해 여론 자체를 자신의 어젠다로 주도하는 장이었다. 트럼프가 문제적 정치인이었지만 워싱턴 특파원 시절 그가 매일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모습만은 놀랍고도 부러웠다. 기자회견을 극도로 피했던 박근혜ㆍ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몰라 답답하던 한국 현실과 비교돼 더욱 그랬다.
윤석열 정부가 청와대를 벗어나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이전한 명분도 소통이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이후 한 번도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설화 리스크를 줄였다고 여기겠지만 용산 이전의 의미가 희미해졌다. 대통령이 ‘인의 장막’에 갇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는 불통의 이미지도 누적되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듯했던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로 회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검찰총장에겐 사기꾼과 범죄자를 때려잡는 결단과 지시가 중요하지, 설득과 타협은 불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은 야당, 공무원, 기업, 언론, 외국 정상 등 온갖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해온 자유민주주의는 지도자의 결단과 명령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 설득과 동의로 작동하는 체제다. 윤 대통령이 민주주의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초심을 갖고 있다면 도어스테핑을 재개하길 적극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