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지난해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중 기후위기 관련 법안 비율이다.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따르면, 지난해 국회에 발의된 기후·에너지·탄소 등 관련 법안은 170건(전체 발의 법안 4,850건)에 불과했다. 의원당 0.56건 꼴이며, 이 중 의결된 건 9건뿐이다.
한국일보는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주요 정당에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기후 법안 목록을 요청했고,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록을 토대로 법안 심사 과정을 추적했다. 국민의힘은 별다른 목록을 공개하지 않았고, 더불어민주당은 4건, 정의당은 3건을 제시했다. 그중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건 2건에 불과했다. 내년 총선 전 통과가 유력한 법안은 1개뿐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탄소중립 산업에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탄소중립 산업법' △재생에너지 등 분산 에너지 확대의 틀을 마련하는 '분산 에너지 활성화 특별법(분산법)' △국가가 풍력발전 개발을 주도하도록 한 '풍력발전 보급촉진 특별법(풍력법)' △석탄화력발전소 등에 부담금을 부과하는 '에너지 전환법'을 중점 추진하고 있다고 21일 밝혔다.
정의당은 민주당의 에너지전환법과 유사한 '탄소세법', 탄소중립 산업법과 유사한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법)'을 중점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화석연료 퇴출에 따라 일자리를 위협받는 노동자를 지원하는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 기본법(정의로운 전환법)'도 추진 중이었다.
국민의힘은 "탄소 감축을 위한 탄소중립기본법이 이미 처리됐다"며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상황 적응을 도울 법안도 마련하고 있다"며 중점 추진 법안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린피스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의힘은 의원당 기후 법안 발의 건수가 0.27건으로 민주당(0.41건)이나 정의당(1.17건)보다 적었다.
그러나 민주당과 정의당 역시 중점 추진하고 있다는 기후위기 관련 법안 처리에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과 관련 상임위 회의록을 보면, 두 당이 중점 추진 중이라고 밝힌 법안 7건 중 5건은 발의된 지 3년이 되어간다. 풍력법(2021년 5월), 분산법(2021년 7월), 탄소세법(2021년 11월), 정의로운 전환법(2021년 12월) 등이다. 에너지 전환법(2020년 10월)은 4년째다.
20대 국회(2016~2020년)의 평균 법안 처리 기간이 약 577.2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5개 법안 모두 다른 법안에 비해 처리가 늦어지고 있는 셈이다. 탄소중립 산업법은 지난달에야 발의됐고, 한국판 IRA법은 발의되지도 않았다.
법안이 오래 계류됐어도 논의가 활발하다면 입법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상임위에서 7개 법안을 심사한 회의는 17번에 불과했다. 2020년 발의된 에너지전환지원법은 그해 11월 상임위원회 전체회의와 2021년 9월 법안 소위 안건으로 상정됐을 뿐 후속 논의는 없었다. 법안 소위에서는 다른 법안에 밀려 이 법안은 언급도 없이 회의가 끝났다. 탄소세법 역시 2021년에만 2차례 논의되는 데 그쳤다. 2021년 12월 발의한 정의로운 전환법도 지난해 5월 전체회의에 상정된 후 11월 법안 소위에서 2차례 논의됐을 뿐이다.
지난달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 소위에서 풍력법의 후속 입법을 논의하던 중, 양이원영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 상정조차 되지 못한 법안도 꽤 많다"며 상임위 간사에게 법안 상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주헌 사단법인 넥스트 수석정책자문위원은 "당초 계획대로라면 2021년 9월 '탄소중립기본법'이 통과된 후 이행 방법을 구체화하는 후속 입법이 탄력적으로 이뤄져야 했다"며 "그러나 지난해 대선에서 기후 정책이 정쟁화되면서 정책 흐름이 불안정해졌고, 그 결과 탄소중립 추진에 공백기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논의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진 법안도 있다. 풍력법과 분산법이다. 소관 상임위에서 6번씩 논의됐다. 다만 이 법안들은 정부와 여당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며 입법이 지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게 풍력법이다. 풍력법은 정부가 해상풍력 발전 입지를 계획하고, 환경 영향 평가를 수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재 국내에서는 민간 사업자가 입지 선정과 각종 인허가 절차를 직접 수행해야 한다. 이 탓에 사업자가 과도하게 수익 경쟁을 하며 어민·주민들과 마찰을 빚거나, 정부 부처 10여 곳에 산재한 인허가 29개를 통과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속출했다.
해상풍력은 대규모 발전이 가능하고 육지에 대한 환경 영향이 비교적 적어 국제적으로도 탄소중립의 핵심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해외에선 영국·독일·중국 등을 중심으로 5년째 연평균 3.6배씩 설비 용량이 늘고 있지만 올해까지 국내 보급량은 0.12GW로, 2030년 목표(약 12GW)의 0.1%에 불과하다. 지난해 국회 입법조사처도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서는 해상풍력 보급 확대가 필수적"이라며 "정부 주도하의 사업 추진과 인·허가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그럼에도 법안은 3년째 국회에 계류돼 있다. 해상풍력의 환경 영향 평가를 어느 부처가 협의하느냐를 두고 3년째 부처 간 씨름이 이어지고 있다.
조은별 기후솔루션 연구원은 "2년 전 이미 바다는 해수부가, 육지는 환경부가 평가하자는 합의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부처 입장이 달라지는 등 똑같은 논의가 진전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안을 처음 대표 발의한 김원이 민주당 의원도 "정권이 바뀌고 부처 입장이 달라지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매우 아쉽다"며 "다만 최근 정부가 법안 심사에 적극적인 입장이어서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재생에너지 등 분산 에너지 확대를 위한 분산법은 지난달 산자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국민의힘이 '분산 에너지'에 태양광·풍력뿐 아니라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추가하자고 했고, 민주당이 이를 받아들인 결과다. 올해 본회의를 통과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풍력법도 그간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던 국민의힘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논의가 진척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기후위기 법안은 논의에서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윤세종 플랜 1.5 변호사는 "한국 정치가 기후 대응에 필요한 입법 추진에 충분한 에너지를 쏟지 못하고 있다"며 "법안이 계류되는 동안 우리는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잃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