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두 남자가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바로 그 그림이다. 왼쪽의 반쯤 누운 남자는 아담, 오른쪽의 반쯤 엎드린 남자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발가벗은 아담의 몸이 심상치 않다. 두툼한 팔근육, 선명한 복근, 온몸이 근육질이다. 노동으로 만든 몸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노동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아담은 어떻게 이런 몸을 만들었을까.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김에 헬스장도 함께 창조했던 것일까. 아니면 에덴동산에 '산스장'(산+헬스장의 신조어)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담의 몸을 만든 것은 운동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아담을 만들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몸도 심상치 않다. 옷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담 못지않은 근육질이다. '피지컬 100'에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의 몸을 완벽하게 묘사한 이유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래 하느님은 형상이 없지만, 인간의 몸으로 현현한다면 그 몸은 권위 있고 아름다울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로 묘사하여 권위를 나타내고, 균형 잡힌 근육질의 몸으로 묘사하여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인간의 몸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은 서구 미술의 오랜 전통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통해 숭고한 절대자의 존재를 묘사하고자 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인간의 의식과 형상을 지닌 '인격신'이었기 때문이다. 서구 미술에 헐벗은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을 묘사한 그림을 보라. 하나같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몸이다.
반면 동양의 신은 '자연신'이다. 어쩌다 인간으로 현현하더라도 늙고 추레한 노인의 모습이다. 신은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주변에 있는 존재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젊고 아름다운 서양의 여신과 달리 동양의 여신은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쪽이 훨씬 원초적인 여신의 모습이다. 다만 그들의 몸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현대인이 선망하는 아름다운 몸은 노동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나르는 공사장 인부도, 땡볕을 맞으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농부도, 그런 몸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은 하체, 내일은 등' 하는 식으로 철저히 단련해야 만들 수 있는 몸이다. 단련된 몸은 아름답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몸은 아니다. 그 의지와 노력은 가상하지만 모두가 그런 몸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왜곡된 미의식을 바로잡겠다며 영양과다와 운동 부족으로 비대해진 몸을 '자연스러운 몸'이랍시고 과시하는 것도 이상하다. 비만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일 뿐이다.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의 용모는 추한 것을 아름답게 바꿀 수 없고, 힘은 약한 것을 강하게 바꿀 수 없으며, 몸은 짧은 것을 길게 바꿀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분수이므로 고칠 수 없다. 오직 마음만은 어리석은 것을 지혜롭게 바꿀 수 있고, 모자란 것을 현명하게 바꿀 수 있다." 人之容貌, 不可變醜爲姸, 膂力不可變弱爲强, 身體不可變短爲長, 此則已定之分, 不可改也. 惟有心志, 則可以變愚爲智, 變不肖爲賢.
'격몽요결'은 청소년용 교재다. 청소년기는 이성에 눈을 뜨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시기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조선시대인들 달랐겠는가. 하지만 타고난 몸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바꿀 수 있는 건 마음뿐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고리타분한 이야기 같지만, 사람의 매력이 외모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몸은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적절한 운동과 건강한 식생활이 만드는 자연스러운 몸이면 충분하다. 요컨대 결론은 '중자단', 즉 '중요한 건 자연스런 몸과 그 속의 단련된 마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