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 산 채로 바다에 빠뜨리고"...칠레의 너무 늦은 과거사 청산

입력
2023.04.18 19:30
1973년 군부 쿠데타 후 17년간 독재 유지
'정치범' 낙인 후 납치·헬기 태워 바다에 수장
"과거사 청산, 너무 늦었다" 증거물 대거 소실

칠레 정부가 아우구스토 피노체토의 쿠데타 50년째를 맞아 과거사 청산에 나선다.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서 정치범으로 몰린 뒤 실종된 이들을 찾아내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로 했다. 이는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의 지난해 대선 공약이었다.

1973년 9월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군정은 국민투표에서 집권 연장안이 부결돼 1990년 실권할 때까지 피의 통치를 했다. 국민을 비밀경찰 수용소에 구금한 뒤 고문, 처형했고, 외국 기자와 외교관을 살해한 혐의도 받는다. 영국 가디언은 “17년간 사망한 칠레인은 최소 3,000명, 고문 피해자는 4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정부가 초점을 맞추는 건 실종자 수색이다. 50년간 생사가 확인된 실종자는 310명에 불과하며, 최소 1,109명은 찾지 못했다. 헬기로 바다에 실려 간 뒤 산 채로 수장된 100여 명은 유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칠레의 과거사 청산은 더디고 약하다. 가디언은 “1970년대 군부 독재를 겪은 이웃나라 아르헨티나의 신속한 과거사 청산 작업과 대비 된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는 독재 정권이 물러나고 약 2년 만인 1985년 군부 고위 관료들에게 종신형을 비롯한 중형을 내렸고, 일선 장교 1,000여 명도 인권 유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 칠레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피노체트 전 대통령은 1998년까지 군 총사령관직을 유지했다. 같은 해 영국에서 뒤늦게 체포돼 300여 개 혐의를 받았으나, 2006년 사망해 처벌을 면했다. 비밀경찰들도 가택 연금 등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콘수엘로 콘트레라 칠레 국립인권연구소 소장은 “인권 침해 규모에 비해 실형이 선고된 사례가 거의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 기관들도 손 놓고 있었다. 지난 2월엔 칠레 법무부 산하 법정의료원(SML)이 독재정권 당시 부검서 등 박스 89개 분량의 자료와 신원미상자들의 유골을 20여 년간 방치한 결과 습기, 곰팡이로 오염돼 손상됐다. 억류실종자유족협회(AFDD)의 가비 리베라 회장은 보리치 정부의 계획을 환영하면서도 “(보존된 증거물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정부의 실종자 수색은 올해 8월부터 시작된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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