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여돌'의 반란… 숏폼으로 뜨고 가사로 사랑받는다

입력
2023.04.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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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진입 피프티피프티, '역주행 신화' 쓴 하이키
전형적인 홍보 방식에서 벗어나 SNS서 입소문 타
자본이 중요 역량 된 시장... '중소의 기적' 희귀해져

K팝 사상 데뷔 이후 최단 기간(4개월) 미국 빌보드 ‘핫 100’ 진입, 핫 100 진입 후 4주 연속 순위 상승,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 34위. 해외 차트에서 파죽지세로 기록을 갈아치우는 K팝 그룹이 등장했다. 뜻밖에도 겨우 2년 전 세워진 중소기획사인 어트랙트의 신인 그룹 피프티피프티다. 이들뿐 아니다. 중소 기획사 GLG 소속 그룹 하이키도 최근 주요 음원차트에서 뒤늦게 순위가 오르는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다. 대형 기획사인 ‘빅4’(하이브, SM, JYP, YG) 소속 아이돌이 점령한 K팝 시장에서 중소 기획사 출신 ‘여돌’(여자 아이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초동·인기 프로그램 내세운 홍보 탈피… ‘숏폼’서 입소문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은 새 앨범 발매 소식만으로도 강력한 홍보 효과를 본다. 탄탄한 팬덤을 등에 업고 초동(한터차트 기준 첫 주간 음반 판매량) 신기록을 세우기 때문이다. 활동이 시작되면 멤버들이 각종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해 포인트 안무(핵심 안무)를 선보이거나 제작 비하인드를 전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인지도를 높인다. 인지도가 낮은 중소돌(중소기획사 출신 아이돌)에게는 모두 기대하기 힘든 일.

지난해 11월 18일 데뷔한 피프티피프티는 해외에서 먼저 인기를 얻었다. 이들의 첫 싱글 '더 비기닝: 큐피드' 타이틀곡 '큐피드'는 국내 대표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멜론에서는 차트에도 들지 못했다. 정작 이 노래가 주목받기 시작한 곳은 바로 틱톡, 유튜브 쇼츠 등 숏폼 기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한 해외 계정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게 기폭제가 됐다. 곡이 좋다며 입소문이 나더니 해외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빌보드 입성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드라마틱한 곡 구성·후크송 대신 서정적인 가사와 음색

K팝 아이돌 곡에는 일정한 흥행 공식이 있다. 곡 초반부터 에너지가 축적되다가 중후반부에 이르러 드라마틱한 고음이 폭발하는 구성, 간결한 영어 가사로 만들어진 후렴구, SNS 챌린지에 최적화된 포인트 안무나 화려한 뮤직비디오가 그것. ‘일레븐’, ‘러브 다이브’, ‘키치’, ‘아이엠’ 같이 중독성 강한 곡을 발매해 스타로 발돋움한 아이브 역시 이 공식을 따랐다.

미니 1집 타이틀곡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로 발매 두 달이 지나서야 주요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오른 하이키는 이런 흥행 공식에서 탈피했다. 강렬한 후크송 대신 ‘나는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 삭막한 이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 고개 들고 버틸게 끝까지 / 모두가 내 향기를 맡고 취해 웃을 때까지’ 같은 서정적인 가사로 대중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이 노래는 한터차트에서 초동 앨범 판매량이 아닌 발매 6주 차에 이례적으로 1위를 했다.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 역시 몽환적이고 나른한 멜로디로 도입부를 사로잡고 차분한 보컬로 곡을 전개하는 등 전형성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K팝 걸그룹 노래보다는 미국 팝스타 도자 캣의 ‘키스 미 모어’나 ‘세이 소’ 같이 서정적인 팝송을 닮았다는 평도 나온다.

‘중소의 기적’ 희귀해진 업계… “음악의 강점으로 타파”

방탄소년단(BTS)만 해도 활동 초 ‘중소의 기적’이라 불렸듯 ‘중소돌’의 흥행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BTS가 신인이었던 10년 전에 비하면 거대 자본 투입이 성공에 필수 요건으로 꼽히는 지금의 K팝 시장 환경에서 중소 기획사가 기적을 만들기에는 훨씬 더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피프티피프티와 하이키의 성공은 중소 기획사에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는 “(둘의 사례는) 대형 기획사와 맞서기 어려운 현실을 음악이 가진 강점만으로 타파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며 “자본에 기댄 흥행 공식에서 벗어난 사례가 K팝 업계에 새 흐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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