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족’을 원했던 우크라이나 키르카치-안토넨코 부부의 꿈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아내 나탈리야가 첫 아이를 가진 지 3개월이 됐을 때 남편 비탈리가 전사했다. 나탈리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이 생전 동결 보존해 둔 정자로 아이의 형제들을 임신해 낳기로 했다. 그는 다른 우크라이나 가족에게도 이런 ‘선택권’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나탈리야는 페이스북에 남긴 남편을 향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서 당신의 눈빛과 웃음과 놀라운 성격을 볼 수 있기를. 네 유전자는 세상에 남을 거야.”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에서 군인의 정자 보존이 ‘애국적인 생각’으로 여겨진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군인의 정자 동결 보존 비용을 지원하자는 법안도 발의됐다. 해당 법안을 낸 옥사나 드미트리에바 의원은 “우리의 유전자 풀에 대한 지속성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NYT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혈통을 보존하려는 시도라고 짚었다.
구체적인 숫자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의 생식의학회장인 유즈코 미하일로비치는 “우크라이나 전국의 병원에서 정자 동결 시술 건수가 늘었다”고 전했다. 일부 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관련 시술을 무료로 제공한다. 키이우의 한 난임병원에서 일하는 나탈리야 톨럽은 “매주 약 10명의 군인 정자 동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정자 동결을 결정한 예고르(31)는 "국가를 수호하고 재건할 애국자의 수를 줄이지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를 경계한다. 러시아 친정부 언론인 올가 스카베예바는 최근 국영TV에서 “(군인 정자 동결은) 국가를 위한 유전자 실험”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인공 시술로 ‘러시아 혐오’ 수준이 올라간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자 동결의 효과를 곧바로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쟁 전부터 감소세였던 우크라이나 인구를 반등시키긴 어려워 보인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1991년 5,200만 명 수준이던 우크라이나 인구는 지난해 2월 러시아 침공 직전 4,350만 명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합계출산율은 1.16명에 그쳤다. 미국 예일대 역사학 명예교수인 제이 윈터는 “실제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는가는 정자 동결의 핵심이 아니다”라면서 “전쟁의 목적인 국가의 생존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에서도 군인에게 무료로 정자 동결을 시술해 주는 업체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전사한 군인의 유족이 시신에서 채취한 정자를 출산에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의회에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