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산불로 소실 위기에 처했던 700년 역사의 명승지 경포대(보물 2046호)가 베테랑 소방관들의 헌신 덕에 거센 화마 속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강화된 문화재 비상소화장치도 큰 역할을 했다.
12일 강원소방본부에 따르면, 전날 오전 8시 22분쯤 이상호(57) 강원소방본부 환동해특수대응단 1기동대장(소방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단체대화방을 통해 강릉 난곡동 산불 소식을 접했다. 30년 경력의 이 대장은 초속 30m가 넘는 바람이 불어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경포 일대가 다 타버릴 것이라고 직감했다. 실제 강풍에 실린 불길은 경포대 정자와 충혼탑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밤새 당직근무 뒤 비번이었던 이 대장은 곧바로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경포대로 향했다.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그는 산림화재 전문강사 경력을 살려 산불확산 지점을 예측, 대원들과 공유한 뒤 본격적인 진화에 나섰다. 이 대장은 "경포대는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축물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고 다급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대장의 지시로 합류한 1기동대원 10여 명은 경포대 누각 근처 비상소화장치함에서 25㎜와 65㎜ 호스를 빼내 누각과 주변 벚꽃 나무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대나무에 옮겨 붙은 불길을 제압하고, 정자에 물을 뿌리며 불티를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대장은 "2018년 2월 숭례문 화재 이후 경포대 주변에도 비상소화장비가 설치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전날 상황을 전했다. 대부분의 소방 인력과 장비가 주불을 따라 진화에 투입되기 때문에 경포대 비상소화장비가 없었다면 제때 진화가 이뤄지지 못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경포대 주변에는 50m 길이 호스를 갖춘 옥외소화전 5개가 설치돼 있다.
진화에 참여한 강릉시 공무원들도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운 강풍과 매캐한 연기 속에서 함께 사투를 벌인 끝에 전날 오후 2시쯤 불길이 잦아들면서 큰 위기를 넘겼다. 이들이 화염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문화재청과 강릉시 공무원들은 경포대 현판 7점을 떼내 오죽헌시립박물관 수장고로 옮겼고, 경포대도 지켜낼 수 있었다.
경포대는 1326년에 건립돼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46호 지정됐다. 대한민국 명승 제108호인 경포대가 이번 화마로 소실됐다면 뼈아픈 기억으로 남았을 수 있었다는 게 강릉 시민들 얘기다. 한 강릉 시민은 "불길이 경포 쪽으로 옮겨붙는다고 해서 조마조마했다"며 "경포대를 살려내는 건 강릉의 상징을 지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