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추억이 담긴 집인데, 야속한 불에 타버렸습니다."
11일 오전 태풍급 강풍을 타고 무서운 기세로 번지는 산불을 피해 강원 강릉 아이스아레나로 몸을 피한 난곡동 주민 이모(84·여)씨는 "앞마당까지 불길이 번지자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슬리퍼만 신고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고 다급했던 상황을 전했다.
이날 오전 8시 24분쯤 이씨 집과 1㎞가량 떨어진 야산에서 시작된 불은 불과 20여 분 만에 60년 추억이 담긴 삶의 터전을 집어삼켰다. 이씨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이 사라져 산불이 야속할 뿐"이라며 "대피 중 주민센터 직원을 일찍 만나 다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불길이 휩쓸고 간 강릉시 난곡동과 안현동, 산대월리, 산포리 주민 800여 명은 잿더미가 된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강릉 아이스아레나와 사천중학교 체육관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뿌연 연기를 몰고 온 불기둥이 마을을 휘감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대피에 체력을 소진한 듯 일부 주민들은 바닥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었다.
임시대피소에 모인 주민들은 전선에 부러진 소나무가 닿은 뒤 불이 났다는 얘기에 산불 원인을 밝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포대 인근에 사는 박선영(75)씨는 "시커먼 연기가 몰려오고 빨리 피하라는 전화에 휴대폰만 갖고 남편과 대피했다"며 "귀중품을 그냥 두고 왔는데, 집이 많이 타버렸으면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 왜 불이 났는지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불이 번진 마을 대부분은 70·80대 고령 인구가 주를 이뤄, 대피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는 게 당국의 얘기다. 안현동 주민 최영복(88)씨는 이날 오전 9시 30분쯤 불길이 마을 앞까지 다가오자 딸의 도움을 받아 필사적으로 탈출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대피소에 와 신경안정제를 먹었는데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다"며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경포대 인근에 사는 최선자(85)씨도 "급하게 아들이 찾아와 몸만 빠져나왔다"며 "평생 이 동네에서 살았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울먹였다.
이날 산불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대한적십자사와 강릉시 등은 대피소가 마련된 강릉 아이스아레나와 사천중 체육관에 쉼터를 마련하고, 이동급식 차량을 운영했다. 또 주민들의 심리지원을 위한 회복지원 차량을 설치하는 등 물적·인적 지원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