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어느 사회에나 다 있지만, 같은 숫자라도 그 쓰임은 다르다. 숫자에는 문화별로 다른 코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424는 이삿짐센터를 이르고, 4989는 중고품을 사고파는 곳을 말한다. 9292는 구이를 파는 음식집에서, 1004는 봉사 단체에서 즐겨 쓰는 전화번호이다. 단연 8282도 인기가 높은 전화번호이다. '빨리빨리'와 발음이 유사한 8282는 택시 회사나 배달업체 등에서 선호한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일을 빨리하면 잘하는 것으로, 그러한 사람을 성실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빨리빨리'는 근면한 한국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지 빠르게 처리하려 하다 보니, 늦어지거나 기다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빨리빨리증후군'도 생겼다. '빨리빨리, 가족주의, 가부장주의' 등은 한국의 정서인 정, 한, 신명과 나란히 한국 문화교육의 내용으로 선정되어 있다. 한국인의 특징적인 사고방식의 하나로 전 세계에 유명해진 '빨리빨리'는 어느새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말에는 '빨리빨리'도 있으나, '담금질'도 있다. 담금질이란 고온으로 달군 쇠를 물이나 기름에 담가 식히면서 굳기 정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담금질한 쇠는 처음보다 더 단단해지는데, 과정 하나를 더 거치더라도 좋은 상태를 빚어내는 정성을 가치롭게 보는 말이다. 은반지를 제작할 때 쓰는 '두드림'도 시간과 정성을 그리는 말이다. 수천 번 수만 번을 두드려 만든 은반지는 원래 은보다 더 윤이 나고 더 강한 성질로 바뀐다. 그래서 담금질이나 두드림은 흔히 부단한 훈련을 빗대는 말로 쓰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오늘날 우리에 비해, 우리 조상들의 말은 어땠을까? 옛말에도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일다경', 밥을 먹을 동안이라는 '한 식경' 등 비교적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2시간을 한 단위로 둔 '한 시진', 낮의 절반쯤 곧 6시간 정도인 '한나절' 등 여유로운 말도 보인다. 한 시진을 걸어 가, 또 한 시진을 기다려 벗과 만나 한나절을 보내는 하루란 마냥 부럽기만 하다. 말은 문화를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문화를 생성하고 정착시키는 힘도 가진다. 빈도가 높아진 '빨리빨리'가 우리 문화를 더 빠른 세상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균형을 잡아 줄 우리말을 찾아내고, 또 자주 써 보려 하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