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2, 3회 투약한다고 치면 필로폰 투약자 남은 수명은 15년인 반면, 펜타닐을 남용한 사람은 2, 3년밖에 못 삽니다. 당장 펜타닐 투약자들을 모두 찾아낸다 해도 이들을 구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죠."
김선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독성학과장은 지난달 30일 강원 원주 본원에서 가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국과수가 처음으로 '마약백서'를 내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국과수에서 중독분석센터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밀려드는 감정 의뢰를 보며, 국과수 근무 후 처음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마약 트렌드'를 반영해 그에 맞는 대책을 신속하게 수립하지 않으면, 한국도 펜타닐로만 한 해 10만여 명이 숨지는 미국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약백서는 최근 5년간 국과수 마약류 감정 데이터를 토대로, 전체 마약사범 증가 추세뿐 아니라 투약자들이 접하는 약물 종류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가장 심각한 마약은 단연 펜타닐이었다.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양성 건수 대비 사망률은 2.62% 수준이지만, 펜타닐은 필로폰의 5배 수준인 10.82%에 달했다. 펜타닐은 헤로인의 100배에 달할 정도로 중독성이 높은 데다, 치사량도 2㎎에 불과하다.
김 과장은 최근 펜타닐 투약 추이를 보면, 과거 농약상에서 흔히 구입할 수 있었던 제초제 그라목손(파라콰트)이 연상된다고 했다. 그는 "그라목손은 단 두 모금만 삼켜도 단시간에 사망하고 치료도 불가능한 농약이지만, 당시 농약상에서 쉽게 살 수 있었다"며 "펜타닐도 '안전역'이 좁아 투약량을 조금만 넘겨도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높지만 병원 처방으로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통계청은 2011년 그라목손이 판매 금지된 뒤 극단적 선택 사망자가 27%나 감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펜타닐은 의료용이기 때문에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어 심각성이 더하다.
김 과장이 약물 중독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1994년 국과수에 입사한 김 과장은 2001년 대전의 한 야산에서 발견됐던 '유서'를 오랫동안 휴대폰에 보관해왔다고 했다. 그라목손이 사인으로 확인됐던 시신 곁 지갑 속 메모에는 맞춤법은 틀렸지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은 한 줄짜리 유서가 있었다. '나는 남에게 나쁘게 하지 않았는데 왜 내 인생은 이럴까.'
김 과장에겐 그의 죽음이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김 과장은 또래들이 한창 공부했을 고교 2학년 때 청주 일대 공사현장을 돌며 막노동을 했다. 오래된 참고서로 밤잠을 쪼개 공부한 끝에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었던 충북대 약대에 진학했다. 그는 식도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 병원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야간엔 병원에서, 주말엔 공사장에서 일했다. 자신도 여러 고비가 있었던 터라 유서 내용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쉽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그라목손이 없었다면 그 50대 남성에게도 힘내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과수 약물 감정 대상 시신들은 극단적 선택인 경우가 많다. 김 과장은 "죽음에 담긴 사연을 볼 때마다, 이들이 쉽게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업무 틈틈이 약물 중독사 관련 분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마약백서를 내는 데 도움이 됐던 '중독 데이터 분석을 위한 데이터 마이닝 플랫폼'도 김 과장이 만들었다. 그간 국과수에는 건별 감정서만 있을 뿐, 백서에 담긴 내용처럼 트렌드를 분석할 수 있는 툴이 없었다. 국과수가 경찰에 감정 결과를 자동으로 통보해 주는 예비통보 프로그램, 국과수 최초의 유전자 대조 프로그램도 김 과장 손을 거쳤다. 유전자 대조 프로그램은 1997년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사고 당시 유가족과 시신 유전자를 비교해 희생자들의 신원을 밝혀 내는 데 쓰였다.
김 과장은 이달 대전과학수사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본원 국과수 중독분석센터장직은 계속 겸직한다. 연말에는 이번에 개발한 중독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통해 약독류 백서도 낼 예정이다. 마약뿐 아니라 전체 약물 중독사의 원인과 최근 트렌드를 밝힌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