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에 사는 신현수(68)씨는 최근 지역축제장을 찾았다가 같이 간 손녀에게 핀잔만 들었다. 축제 시작을 기다리며 개회식부터 자리를 지켰는데 소개받은 내빈들 축사가 1시간 가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신씨는 “손녀가 축제 보러 가자더니 할아버지가 속였다고 울더라”면서 “감투 쓴 사람은 죄다 꼭 그렇게 나와서 돌림노래처럼 한마디씩 해야 하는 건지 보는 이가 낯 뜨거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주춤했던 지역 축제가 4년 만에 부활하고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의전 소요 시간이 길어져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다음 달 5일 재보선에 22대 총선도 1년여 앞으로 다가온 만큼 축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유세장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30일 각 지방자치단체 등에 따르면 지난 24일 열린 진해군항제 개막식의 경우 우천 속에 축제협회장 개막선언, 시장 환영사, 지역구 의원 축사, 자매도시 축전 등 10여 명의 연설이 이어졌다. 18일 진행된 창원소싸움 대회에선 개막식만 1시간 넘게 진행돼 관람석에서 야유까지 터져 나왔다. 교육감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울산에 사는 최민석(53)씨는 “선거는 축제란 말이 있긴 하지만 요즘은 아예 축제가 선거판이 된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행정안전부가 2021년 개정·발간한 ‘정부의전편람’에 따르면 ‘비효율적 관행 개선을 위해 지역행사에선 참석인사의 소개, 인사말(기념사, 환영사, 축사, 격려사 등) 참여 인원과 시간을 최소화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편람 말미에는 그동안 각급기관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인 결과 행사 간소화가 차츰 정착되고 있는 추세라는 평가도 있지만, 최근 지역 축제장에서는 이런 말이 무색할 정도다.
행사 주최 측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의전을 놓고 관련기관 및 단체 간 갈등이 불거지는가 하면 좌석배치, 참석자 소개, 인사말 순서 등을 결정하느라 정작 콘텐츠에 대한 고민은 뒤로 밀리기 일쑤다. 게다가 코로나19 기간 동안 일상화된 비대면 문화로 직접 참석하는 대신 영상만 보내는 경우도 많아 아예 영상 축사를 금지하는 행사장이 생겨날 정도다. 31일 개막하는 경남 창녕 부곡온천축제 관계자도 “영상을 받으면 행사가 한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내빈 소개는 스크린 화면으로 대체하고, 간단한 축전 외 영상 축사는 받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개선 가능성이 커 보이진 않는다. 일례로 울산시는 2018년 내빈 소개 및 인사말 생략, 참석한 순서대로 앉는 자율 좌석제 등 ‘각종 행사 간소화 추진계획’을 마련하고 묵은 관행을 대폭 손질하겠다며 나섰지만 유야무야됐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내빈 소개에 이름이 빠졌다는 항의가 들어와서 행사 중간에 뜬금없이 다시 소개를 한 적도 있다”며 “정책에 실패한 공무원은 용서해도 의전에 실패한 공무원은 용서 못 한다는 소리가 괜히 나왔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재욱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축제장에 등장하는 정치인이 득이냐 실이냐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면서도 “과도한 의전은 축제의 질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정치인들에게도 독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