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9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불리했던 선거’를 리더십과 전략ㆍ전술을 통해 역전했던 가장 대표적인 선거를 꼽으면 무엇일까?
단연 2012년 총선을 꼽을 수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진두지휘했던 2012년 총선은 불리했던 ‘선거의 교과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총선 분석은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시사점을 제공한다.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2012년 총선을 둘러싼 당시 상황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2월에 출범했다.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세 차례 선거를 모두 압승했다. 권력을 독점하게 되니 비판도 집중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으로 상징되는 ‘복지열풍’이 불었다.
2011년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찬반투표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부결됐다. 오세훈은 사퇴했다. 당시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안 해도 되는 서울시장 재ㆍ보궐 선거를 하게 됐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선을 앞두고 ‘안철수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양자 가상대결에서 안철수가 박근혜를 앞섰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심판’의 에너지가 치솟고 있었다.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원순 후보가 53%를 득표해 승리했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놀라운 점은 ‘세대별 투표성향’이었다. 방송3사 출구조사에 의하면 20대는 박원순(69.3%), 나경원(30.1%)을 찍었다. 30대는 박원순(75.8%), 나경원(23.8%)을 찍었다. 40대는 박원순(66.8%), 나경원(32.9%)을 찍었다. 20대, 30대, 40대 유권자가 모두 약 70% 정도 ‘진보’를 선택했다. 한나라당은 약 30% 지지에 그쳤다. 지금 봐도 놀라운 결과였다. 당시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여론지형이었다.
2012년 4월 11일이 총선이었다. 박근혜 비대위는 2011년 12월 말에 꾸려졌다. 박근혜 비대위의 특징은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박근혜 비대위원장 본인이 가장 강력한 ‘미래 권력’이었다. 역대 한국 정치사를 복기해 보면 집권 여당은 집권 초반에 패배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집권 후반에 승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선거 승리와 상관관계가 가장 높은 것은 ‘임기 몇 년차’인지다. 임기 후반부가 될수록 ‘심판 선거’의 양상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2012년 4월 총선은 이명박 정부 5년 차였다. 완전 불리한 선거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전면에 나섰다. ‘현재 권력’에 대한 심판 에너지를 ‘미래 권력’을 통해 방어한 경우였다.
둘째, 비대위 구성부터 중도확장의 콘셉트를 분명히 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2011년 12월 26일 비대위원회 구성을 완료했다. 비대위는 당연직 2인, 초선 의원 2인, 외부인사 6인으로 구성됐다. 특히 주목할 것은 외부인사 4인이었다.
외부 인사에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상돈 중앙대 교수, 이준석 클라세스튜디오 대표, 조현정 비트컴퓨터 대표가 포함됐다. 김종인 전 수석은 경제민주화를 상징했다. 이상돈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비판을 상징했다. 이준석 대표는 당시 26세였다. 청년을 상징한다. 조현정 대표는 벤처기업 1세대였다. 네 명의 비대위원이 상징하는 것은 ‘반(反)MB’였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약점은 ①대기업을 옹호하는 세력 ②4대강 추진세력 ③노인 정당이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최대한 ‘한나라당스럽지 않은’ 사람들로 비대위를 구성했다.
셋째, 박근혜 비대위원회는 세 가지가 없었다. ①친박(박근혜계)이 없었다. ②친이(이명박계)가 없었다. ③반북(反北) 강경보수 인사도 없었다. 역시 ‘한나라당스러운’ 약점을 커버하기 위한 것이었다.
넷째, 박근혜 비대위는 ‘당의 근간’에 해당하는 세 가지를 더 바꿨다. ①당명을 바꿨다.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②당을 상징하는 색깔을 바꿨다. 파란색으로 빨간색으로 바꿨다. 보수에게 빨간색은 ‘빨갱이’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빨간색을 채택했다. ‘강력한 변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③정책노선(정강ㆍ정책)을 대폭 바꿨다. 특히 이 부분이 놀랍다.
정책노선의 변경을 잠시 살펴보자. 정부와 시장경제의 관계에서 “강한 정부, 경제민주화”를 반영했다. “보편주의와 선별주의를 아우르는 평생 맞춤형 복지”를 채택했다. “비정규직 차별해소와 정규직 전환 노력”도 수용했다. 기존 정책을 삭제하기도 했다. “큰 시장, 작은 정부”, “복지 함정에서 탈출”, “북한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환” 조항을 모두 삭제했다.
선거는 4월 11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선거를 딱 2개월 앞두고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의 근간’에 해당하는 세 가지를 바꿨다. 재창당에 버금가는 변화였다. 과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 역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꾼” 경우였다.
2012년 1월 당시 민주통합당(현재 더불어민주당)은 지도부 경선과 전당대회를 했다. 100만 명이 넘는 지지자들이 모바일 경선에 참여했다. 당시 리얼미터 조사에 의하면, 12월까지만 해도 민주당은 정당 지지율에서 한나라당에 5~10%포인트 뒤지고 있었다. 12월 3주차, 한나라당 지지율은 29.9%였다. 민주당은 22.2%였다. 민주당은 12월 5주차에 처음으로 역전에 성공한다. 1월 3주차에는 격차가 최대로 벌어졌다. 민주당 39.7%, 한나라당 29.1%였다. 무려 10.6%포인트까지 벌어졌다. 민주당의 총선승리 가능성이 높아졌다.
민주당에 지지율이 역전되었을 때,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 당 색깔, 정책 노선 변경을 2월 13일에 통과시킨다. 2월 3주차였다. “경제민주화, 복지 강화, 강한 정부”를 전면에 내세웠다.
2월 13일 정책 노선의 혁신 이후, 딱 3주가 지나자 정당 지지율이 재역전됐다. 3월 1주차부터 새누리당(국민의힘) 40.3%, 민주당 32.7%가 됐다. 새누리당은 7.6%포인트 앞서게 됐다. 총선 직전 마지막 여론조사였던 3월 4주차에는 새누리당 39.8%, 민주당은 30.5%였다. 새누리당은 9.3%포인트를 앞서게 됐다.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 152석, 민주당은 127석이었다. 새누리당의 과반 승리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민주당스러운’ 정책을 통해 ‘민주당의 중도표’를 뺏어온 경우다. 과감한 중도확장의 교과서적인 사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새누리당 총선 승리의 또 다른 숨은 공신은 ‘민주당의 리더십’이었다. 민주당의 총선 지도부는 한명숙 대표였다. 당시 1심에서 유죄를 받았던 임종석 전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지명했다. 당연히 여론의 반발이 커졌다. 결국 사퇴했다. ‘무경선 전략공천’ 지역을 먼저 발표했다. 언론의 집중 공격을 자초했고 당내 갈등은 더 커졌다. 팟캐스트 방송 ‘나는꼼수다’ 출신 김용민 후보의 막말 파동이 벌어졌는데 후보 사퇴를 관철시키지 않았다.
선거는 ‘51% 게임’이다. 진보파도, 보수파도 단독으로 51%를 받을 수 없다. ‘유권자 연합’이 중요하다. 전통적인 지지층이 이탈하지 않되, 과감한 중도확장에 성공하는 것. 선거 승리의 법칙이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