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를 비웃는 코미디는 그만두기로 했다

입력
2023.03.31 04:30
14면
농담을 가장한 혐오를 지워낸 해나 개즈비
신간 '차이에서 배워라'

“코미디를 그만둬야겠어요.”

10년 넘게 호주와 영국 코미디 페스티벌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호주 출신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45)가 느닷없이 관중 앞에서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폐성 장애, 주의력결핍장애(ADHD), 레즈비언. 다양한 소수자성을 가진 해나 개즈비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비방이 난무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비하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소수자성을 깎아내리는 건 코미디가 아니라 수치일 뿐임을 깨달았다. “남자들이 코미디하다가 화를 내면 다들 괜찮다고 생각하죠. 내가 화를 내면? 불행한 레즈비언입니다.” 그의 코미디 중단 선언은 주류에 편승해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코미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해나 개즈비는 주류 스탠드업 코미디의 대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토리 쇼 ‘나네트’(Nanette)를 선보였다. 전반부는 웃음을 터뜨리는 농담이 가득했지만 쇼가 진행될수록 해나 개즈비의 굴곡진 인생사가 드러났다. 소수자로서 겪은 고통과 트라우마를 관객 앞에 그대로 보여준 것. 뿐만 아니라 유머라는 무기로 관객의 공감을 불러오는 데도 성공했다. 2018년 넷플릭스 스페셜로 공개된 '나네트'는 에미상과 피바디상의 영예를 안으며 해나 개즈비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왜 사람들이 내 불행을 들어야 하지?’ ‘지난 얘기를 해서 뭐가 나아지지?’ '나네트'를 선보이기 전 해나 개즈비는 줄곧 회의감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동성애가 범죄로 여겨지던 보수적인 태즈메이니아주에서 성소수자로 태어나 자기혐오에 빠졌던 그의 성장기를 따라가다 보면 깨닫게 된다. 해나 개즈비의 인생 자체가 사회적 약자를 웃음거리로 삼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것을 말이다.


최은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