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1월 18일 미국 동부 뉴욕주 처치빌 도로의 수로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희생자는 10세 소녀인 카르멘 콜론(Carmen Colon). 살해 수법은 목을 졸라 죽인 '교살'이었다. 시신에선 성폭력 흔적도 발견됐다.
카르멘은 처치빌에서 약 20㎞ 떨어진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이틀 전 실종된 상태였다. 조부모와 살던 카르멘은 할머니 심부름을 다녀오다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범인을 잡기 위해 로체스터 경찰이 1년여간 수사에 나섰지만,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카르멘이나 할머니가 특별히 원한을 산 정황이 없었고, 실종 당시 목격자도 없어 용의자조차 특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로체스터 경찰서의 살루비오 형사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피해자 이름인 'Carmen'과 성 'Colon', 시신이 유기된 지명인 'Churchville'의 머리글자가 'C'로 모두 일치했던 것이다.
살루비오 형사는 이를 근거로 "①범인이 피해자 이름을 알고 있는 면식범이고, ②우발적 범죄가 아니라 의도된 계획 살인"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카르멘 주변 인물을 샅샅이 조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상부는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며 살루비오 형사의 보고를 묵살했다. 결국 경찰 수사는 흐지부지 마무리됐고, 카르멘 피살 사건도 점차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1973년 4월 2일, 카르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피해자는 로체스터에 거주하는 11세 소녀 완다 워코위즈(Wanda Walkowicz).
완다는 이틀 전 로체스터에서 실종됐다가 약 11㎞ 떨어진 뉴욕주 웹스터에 위치한 104번 주립도로 휴게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교살 및 성폭행 흔적도 발견돼 카르멘 사건과 동일범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사람들이 진짜 놀란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이번에도 완다의 이름(Wanda)과 성(Walkowicz), 시신 유기 장소(Webste)의 첫 글자가 'W'로 똑같았던 것이다.
경찰도 이젠 더 이상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로체스터 경찰은 소아성애자의 계획된 살인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범인 검거에 나섰다. 그러나 카르멘 사건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목격자나 단서가 없어 수사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73년 11월 25일, 경찰의 무능을 비웃듯이 유사한 살인 사건이 또 일어났다. 세 번째 희생자는 로체스터에 거주하는 11세 여아 미셸 마엔자(Michelle Maenza).
미셸 역시 로체스터 피자 가게에서 목격된 것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다음 날 로체스터에서 24㎞ 지점에 있는 메이스던 지역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 성폭행 흔적, 그리고 이름(Michelle)과 성(Maenza), 시신 유기 장소(Macedon)의 머리글자가 'M'으로 일치했다. 카르멘과 완다가 살해된 두 사건과 판박이였다.
지역 언론은 물론 미국 중앙 언론들도 그때부터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특히 '로체스터 알파벳 살인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미 언론들을 도배하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급부상했다.
소극적 대응만 일삼았던 경찰도 이 사건을 '연쇄 살인'으로 규정하고, 특별 대응팀을 꾸려 대대적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살해당한 소녀 3명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고,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학교를 꾸준히 다니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해 냈다. 이에 아이들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로체스터의 복지기관과 학교 관계자들을 상대로 집중 조사를 펼쳤다. 용의자로 조사한 인원만 수백 명에 달했다. 하지만 경찰은 끝내 범인을 특정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던 와중에 "미셸 마엔자와 닮은 소녀를 차에 태우고 있던 한 남자를 봤다"는 목격자가 등장했다. 경찰은 그의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해 미 전역에 뿌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제보가 이어지지 않아 수사에 유의미한 진전은 없었다.
경찰 수사 도중 범인으로 추정된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10대 소녀를 폭행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는데, '테르미니'라는 이름의 용의자가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테르미니가 숨진 후엔 더 이상 '소녀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자, 경찰은 그가 진범일 수 있다고 보고 보강 수사를 진행했다. 그럼에도 테르미니가 범인이라는 구체적 증거를 찾진 못했다. 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로체스터 알파벳 살인 사건'은 그렇게 영구미제로 남는 듯했다.
알파벳 살인 사건이 미 동부인 뉴욕주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로체스터 살인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지 4년 후인 1977년부터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유사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다만 서부 알파벳 살인 사건 피해자들은 10대 초반 소녀가 아니었다.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성매매 여성이었다. 하지만 △록산느 로가시(Roxane Roggasch) △파멜라 파슨스(Pamela Parsons) △트레이시 토포야(Tracy Tofoya) △카르멘 콜론(Carmen Colon) 등으로 모두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가 같았다.
게다가 시신에 폭행 흔적이 있고, 사인도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로 로체스터 알파벳 살인 사건과 매우 비슷했다. 이 때문에 로체스터 연쇄 살인마가 서부로 이동해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마지막 희생자인 카르멘 콜론은 로체스터의 첫 번째 희생자와 이름이 같아, '범인의 의도적 살인'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그러나 희생자 연령대가 로체스터의 피해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신 유기 장소도 제각각으로 피해자 이름과 일치하진 않았다. '동일범 소행이 아니라, 모방범죄일 수 있다'는 추정이 나왔던 이유다.
문제는 캘리포니아 경찰 역시 범인 행방을 찾지 못해 서부 알파벳 살인 사건마저 미제로 남게 됐다는 점이다. "경찰이 로체스터 살인 사건과 동일범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는 역대급 무능함을 보여 줬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런데 30년 이상이 훌쩍 지난 2011년 조지프 나소(Joseph Naso)라는 77세 남성이 '알파벳 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됐다. 좀도둑질을 여러 차례 했던 그는 식료품 절도 사건에 연루돼 가택 조사를 받게 됐는데, 이때 경찰이 과거 연쇄 살인 사건 기록이 담긴 다이어리를 발견한 것이다.
해당 다이어리에 기재된 내용은 1977년부터 발생한 '서부 알파벳 살인 사건' 4건에 관한 것이었다. 피해자 이름은 물론, 범행 장소와 구체적인 범행 수법까지 적혀 있었다. 경찰은 즉각 조지프 나소를 용의자로 체포하고 심문했다. 핵심 물증이나 다름없는 다이어리를 들이밀자 그는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다. 반면 '동부 로체스터 살인 사건'에 대해선 혐의를 철저히 부인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 결과, 나소는 1970년대 초반까지 뉴욕주 로체스터에 거주했다가 서부 네바다주로 이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의심은 합리적이었고,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이어리 내용 외엔 모조리 부인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나소는 정말로 동부 알파벳 살인 사건과 무관할까. 3건의 로체스터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에 그 지역에서 살았던 사실까지 드러났지만 이 정도로 그를 범인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현재로선 직접증거는커녕 그 이상의 정황증거조차 없다. 결국 그가 자백하지 않는 한 '동부 사건'은 영원한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