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패권을 두고 첨예한 갈등을 벌이는 상황에서 3년 만에 중국을 찾았다. 이 회장은 두 나라 시선을 의식한 듯 조용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6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25일부터 사흘 동안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발전포럼(CDF)'에 참석 중이다. 이 포럼은 2000년 창설된 중국의 주요 대외 경제 교류 행사로 중국 행정부인 국무원 발전연구센터가 주최한다. 올해 주제는 '경제 회복, 기회와 협력'이다. 30여 명의 중국 중앙부처 지도급 인사와 20여 명의 국유 기업, 금융기구 책임자 등이 참석한다. 이재용 회장을 비롯해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앨버트 보울라 화이자 CEO, 아민 핫산 나세르 아람코 CEO 등 글로벌 기업 고위 인사 100여 명도 초대받았다.
이 회장은 23일 중국에 도착한 뒤 24일 중국 톈진 삼성전기 사업장을 방문했다. 이 회장이 중국 내 삼성 사업장을 간 것은 2020년 5월 중국 산시성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사업장 방문 후 3년 만이다. 이 회장은 2021년 가동을 시작한 삼성전기 톈진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생산 라인을 살펴보고 현장 근무자들을 격려했다. 톈진 공장은 부산 사업장과 함께 글로벌 시장에 정보통신(IT)·자동차용 MLCC를 공급하는 생산 거점이다. 이어 이 회장은 천민얼 톈진시 서기와 면담을 가졌다. 톈진에는 삼성전기 MLCC·카메라 모듈 생산 공장, 삼성디스플레이 스마트폰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모듈 생산 공장, 삼성SDI 이차전지 공장이 있다. 천민얼 서기는 2002∼2007년 저장성 서기를 역임한 시진핑 주석과의 인연으로 중국 정계에 급부상한 시자쥔(習家軍)의 대표주자 중 하나다.
업계에서는 이 회장이 이번 중국 출장에서 현지 반도체 사업 관련해 논의할지를 최대 관심사로 꼽고 있다. 22일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반도체과학법'에 따라 제공하는 투자 보조금을 받으면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확장할 수 없다는 '가드레일' 규정을 발표한 직후이기 때문이다.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공장을 지으려는 삼성전자가 투자 보조금을 신청할 경우 중국 시안에서 운영 중인 낸드플래시 공장에는 추가 투자를 할 수 없다.
하지만 25일 오후 포럼 일정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 댜오위타위 국빈관에 도착한 그는 현지 특파원들의 질문에도 "북경(베이징) 날씨가 너무 좋죠"라며 말을 돌렸다. 이는 미국이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상황에서 중국에 생산 라인을 구동 중인 삼성의 난처한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 회장의 출장에 반도체 관련 임원은 함께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신 이 회장은 삼성이 미래 먹거리로 강조하고 있는 바이오, 파운드리 분야의 영업에 발 벗고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포럼에 화이자, 존슨앤존슨, 로슈, 사노피 등 글로벌 주요 제약회사 CEO가 참석한 만큼 이들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사업 협력을 얘기 나눌 것으로 보인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인천 송도에 약 2조 원을 투자해 5공장 설립 계획을 확정했다. 이 공장이 다 지어지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글로벌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중 압도적 1위 규모를 달성하게 된다.
또 이 회장은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도 만나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 확대를 두고 논의할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퀄컴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8 1세대' 전량을 수주했지만, 공정 수율 안정화에 차질을 빚으며 차기 모델인 '스냅드래곤8 플러스 1세대'와 '스냅드래곤8 2세대' 물량을 대만의 파운드리 기업 TSMC에 뺏겼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 입장에서 미중 두 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도체 관련 언급을 하거나 관련 일정을 소화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회장이 삼성의 미래 사업 분야와 관련된 일정에 집중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