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뒤를 이어 쇼팽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 바통을 이어받은 브루스 리우가 13개월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지난번엔 콩쿠르 결선무대에서 연주했던 쇼팽 피아노 콘체르토를 무대에 올려 단발성 공연을 가졌지만 이번엔 오케스트라의 방해 없이 오롯이 피아노 독주만으로 서울, 고양, 대구, 부산, 안산 등을 순회하며 5개 도시의 청중을 찾았다.
한 인터뷰에서 피아니스트로서 가장 어려운 점을 묻는 질문에 리우는 "신선함, 영감, 창의성(freshness, inspiration, and creativity)을 지키는 일"이라 대답했었다. 완벽함이란 완벽하지 않는 불안전한 요소를 결합하는 데 있으며, 디테일의 완벽성에 집착하다가는 감정과 자발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도 토로했다. 신선함에 대한 갈망은 이번 내한 공연에서 들려줬던 프로그램 선곡에도 투영되었다. 그에 따르면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바로크의 대표 작곡가인 바흐나 스카를라티에 밀려 제대로 만개하지 못했던 라모의 작품을 발굴했고, 발라드와 스케르초의 유명세에 가려졌던 쇼팽의 돈 조반니 변주곡, 기존의 에튀드(Op.10 & 25)에 눌려 잘 연주되지 않은 쇼팽의 누벨 에튀드를 연주하며 한국의 청중에게 신선한 영감을 선사했다.
리우의 연주 스타일은 낯설고 독특하다. 외성에 덮여 잘 들리지 않는 중간 성부의 내성을 양손 엄지와 검지를 활용해 생뚱맞게 끌어내고, 악보에 표시되지 않은 악센트를 약박에 입혀 신기한 어조를 구현한다. 남들은 촌스럽게 들릴까 기피하는 해석을 용감하고도 유머러스하게 펼쳐놓는데, 특정 부분의 리듬을 과장하는 장면에선 게임하듯 즐기는 재기 발랄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쇼팽 콩쿠르 때만 해도 이 연주자 특유의 정형화시킬 수 없는 다종다양한 표현이 실은 정교하게 계산된 음악적 의도라 짐작했었다. 그런데 이번 연주를 접하고 나니 그 판단에 자신이 없어졌다. 미리 계획된 해석일지 아님 무대 위의 즉흥적 영감에서 기인한 것일지 도통 분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리우의 독특한 페달기법은 그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포르티시모의 거대한 음량을 뿜어내야 할 부분에서 돌연 음량을 약화시키는 소프트 페달을 과감히 활용했는데, 화려한 음색의 근육질 사운드를 기대했던 청중에게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었다. 그러나 큰 소리를 내려면 악기의 물리적 음량이란 한계에 부딪히지만, 작은 소리는 오히려 무한대의 침묵으로 차원이 다른 가능성을 펼쳐주기 마련이다. 음량을 증폭시키고 소리를 섞는 댐퍼 페달을 과감히 절약하니 치장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소리가 생명력을 만개했다. 리우 고유의 사운드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2022년 3월 29일, '세계 피아노의 날'을 기념하며 세계 굴지의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이 리우와 독점 계약을 맺었다. '상상력과 즉흥성이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지적이며 역동적인 예술가'라는 신뢰 덕택이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음악비평지 레뮤지카(ResMusica)는 리우의 독특한 상상력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의 연주를 듣다 보면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지만, 믿고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리우는 천변만화의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연주자이다. 같은 모양의 선율이 연이은 반복으로 등장할 때 그냥 놔두거나 무심히 지나는 법이 없다. 음량이건 아티큘레이션이건 아고긱이건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다. 익숙함에 매몰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해석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할 말도 많고 아이디어도 풍부한 그의 음악적 DNA는 늘 낯선 새로움을 추구한다. 리우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개설하며 이런 문구를 대문에 내걸었다. "What we all have in common is our difference." (우리의 독특함이 우리 모두의 공통점이다.) 보편성의 권력에 매몰되지 않는 그의 독특한 음악적 여정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