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막고굴이 먼저고 다퉁 운강석굴과 뤄양 용문석굴이 뒤를 이었다. 굴착 시기에 따른 순서다. 3대 석굴이고 모두 세계문화유산이다. 오호십육국 시대 선비족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위(魏)라 했다. 역사에서 북위라 한다. 중원을 포함해 북방을 통일하고 약 150년을 통치했다. 불교 융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왕조다. 수도 다퉁 시절에 운강석굴을 만들었다. 7대 황제 효문제 시대인 494년 뤄양으로 천도했다. 이번에는 용문석굴을 만들었다. 366년 처음 굴착된 막고굴에도 254호굴 등 북위 시대 석굴이 많다.
뤄양 남쪽에 고속철도역이 생겼다. 룽먼(龍門) 역이다. 베이징에서 3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용문석굴(龍門石窟)까지 차로 10분 거리다. 입구를 지나면 왼쪽으로 이하(伊河)가 흐른다. 남쪽에서 발원해 뤄양을 지나 황하로 흘러간다.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인 서쪽과 왼쪽인 동쪽에 석굴이 있다. 북위가 조성한 석굴은 대부분 서산에 있다. 당나라 시대까지 계속 확장했다. 약 400년 동안이나 활황이었다. 크고 작은 석굴이 2,345개에 이른다. 깨알 같은 불상까지 합하면 10만여 개에 이른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잠계사(潛溪寺)와 만난다. ‘계곡이 숨어 있다’는 뜻이니 뜻밖이다. 당나라 고종 시대에 만들었다. 조성할 때 지하로 계곡물이 흘렀다. 높이와 너비가 9m, 깊이는 7m에 이른다. 주불인 7.38m의 아미타불이 앉아있다. 제자인 가섭·아난과 함께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나란히 조각돼 있다. 왼쪽에 위치한 대세지보살은 보물 같은 존재다. 풍만한 몸매와 우아한 몸가짐을 잘 드러냈다는 평가다. 당나라 석각 예술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복제해 베이징 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옆모습만 봐서는 어떤 매력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옆에 빈양동(賓陽洞)이 있다. 3개의 석굴이다. 강 건너에서 보면 전체 석굴이 한눈에 보인다. 1층에 세 개의 석굴이 나란하고 4층까지 불감이 많다. 중동을 기준으로 왼쪽이 남동, 오른쪽이 북동이다. 북위가 만든 중동은 영암사(靈巖寺)라 불렸다. 위서(魏書) 기록에 따르면 선무제가 ‘영암사에 고조와 문소황후를 위해 석굴을 조성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친모인 고조용은 고구려에서 출생했다. 귀인 신분으로 뤄양 천도 과정에서 이승을 떠났다. 아들이 황제가 됐으니 황후로 추존됐다.
중동을 짓는데 24년이 걸렸다. 높이 9m, 너비 10m, 깊이 12m인 거대한 석굴이다. 정면과 양쪽 측면까지 모두 일입불이보살(一立佛二菩薩) 체제로 구축했다. 주불을 중심으로 제자와 보살이 나란하다. 한껏 방긋한 미소로 석가모니가 반겨주는데 진입할 수 없다. 벽면에 효문제와 문소황후의 예불도(禮佛圖)를 비롯해 아름다운 부조들이 있었다. 1930년대에 미국인 앨런 프리스트(Alan Priest)의 사주를 받은 석공들이 뜯어갔다. 두 예불도는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캔자스시티 넬슨-앳킨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벽면에 무려 1만5,000개에 이르는 부처를 새긴 만불동(萬佛洞)과 만난다. 손가락 하나 크기의 불감 속에 손톱만큼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두 개의 방으로 나눠져 있다. 전실(前室)에 역사(力士)와 사자가 지키고 있고 후실에 연화좌에 앉은 아미타불과 제자, 보살, 천왕이 자리 잡고 있다. 윗면에 연꽃을 새겼다. 둥근 테두리 부위에 색감을 입혀 글자가 또렷이 보인다. 대당영륭(大唐永隆) 원년이라 특정했다. 당나라 고종 680년이다. 축성 일시와 책임자로 보이는 대감과 선사 이름도 있다. 친절하게 일만오천존불감(一萬五千尊佛龕)이라 새겨놓았다.
연꽃이 조각된 연화동(蓮花洞)이 있다. 석가모니 입상 위에 마치 우산처럼 받치고 있다. 지름이 3m가 넘는다. 한가운데 꽃술 부위에 구멍을 내 열매가 맺힌 듯하다. 바깥에는 두 겹으로 꽃받침을 포갰다. 테두리는 인동꽃을 둘렀다. 노랑과 하양 꽃이 함께 피는 금은화가 아닌가? 가늘게 그린 생김새가 지렁이가 꼬불꼬불 기어가는 듯하다. 남북조 시대부터 유행한 문양이다. 북위 석굴에서 연꽃과 함께 인동 문양을 만나다니 예상 밖이다. 눈을 부릅뜨고 봐야 감동과 만난다.
제자 가섭의 머리가 없다. 원래 깊은 눈과 큰 코, 돌출된 가슴 근골과 메마른 체형을 지닌 수도승 형상이다. 머리가 잘려 나가니 혼백이 사라진 듯하다. 머리는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입구 왼쪽 윗부분에 용문석굴에서 가장 작은 불상도 있다. 불과 2㎝ 크기다. 갈 때마다 눈길만 보낸다. 도대체 카메라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담기도 쉽지 않다.
오른쪽에 이궐(伊闕)이란 필체가 있다. 명나라 시대 허난 순무를 역임한 조암의 솜씨다. 룽먼의 옛 지명이다. 기원전 293년 진나라가 중원 진출을 도모하며 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진나라의 대승으로 끝난 이궐지전(伊闕之戰)이다.
용문석굴의 랜드마크인 봉선사(奉先寺)에 이른다. 너비 30m인 대형 석굴이다. 무측천이 출자해 만들었다. 거대한 불상인 노사나대불이 자리 잡고 있다. 머리가 4m, 귀가 1.9m이고 전체 높이가 17.14m다. 무측천은 막고굴에도 35.5m 크기의 미륵보살을 세웠다. 노사나불은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지닌 부처로 삼신불 중 보신불(报身佛)이다. 무측천 얼굴을 담았다고 추정한다. 그래서인지 초상화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체가 많이 손상됐지만 여전히 의젓한 자세로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노천 상태에서 불상을 세웠다. 아난과 가섭, 보살과 천왕, 역사까지 완벽한 팀을 이루고 있다. 크기나 위치도 적절하게 배치했다. 개성을 살리면서도 전체가 조화롭다. 가섭은 머리 일부와 팔이 떨어져 나가 조금 흉물스럽다. 아난은 손목은 없어도 온전한 편이다. 모퉁이에 있는 보살은 늘씬한 자태다. 옷자락 넓은 가사를 걸치고 포물선 그리듯 하늘거리는 주름까지 세밀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다. 머리에는 세속에서 사용하는 왕관을 썼다. 부처 옆에서 공양하니 무측천 자신이 아닐까? 노사나불과도 상당히 닮았다.
오른손으로 3층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사대천왕 중 북방을 수호한다. 왼손은 허리에 살짝 대고 누구라도 덤비면 혼낼 태세다. 이를 악 물고 있는 귀신인 야차를 전투 신발로 꽉 짓밟고 있다. 두 눈이 튀어나온 금강역사는 1953년 석굴 토사를 청소할 때 구석에서 발견됐다. 도굴꾼이 가져가기에 너무 크긴 하다. 반대쪽에도 천왕과 역사가 있는데 많이 훼손된 상태다. 벽면에 수많은 불감이 있다. 불상은 대부분 온전하지 않다. 머리가 상당 부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바람이 가져갔을 리 없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산 전체에 빈틈없이 구멍을 뚫었다. 나무 계단을 만들어 연결하고 있다. 오르내리며 곳곳에 숨은 석굴을 관람한다. 큰 석굴은 지면과 가깝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다. 군데군데 자그마한 석굴에 숨은 불상 흔적은 각양각색이다. 불감 없이 조각된 불상도 셀 수 없이 많다. 부드러운 바위에 자유롭게 불심을 새겼다. 황제나 왕족이 굴착한 대형 석굴은 모두 이름이 있다. 이름 없는 불상이라 해도 부처와 제자, 보살이 구색에 맞춰 마련돼 있다. 손이 닿을 정도면 인간의 탐욕이 지나갔다. 이교도의 야만일 지 모른다. 유난히 머리에 상처가 많다. 애통한 기록이다.
계단 따라 올랐다 다시 내려오면 고양동(古陽洞)이 나온다. 강 건너에서 보면 봉선사 왼쪽에 위치한다. 천도하자마자 만들었으니 가장 오래된 석굴이다. 효문제가 할머니인 빙태후의 공덕을 기렸다. 높이와 깊이가 11m이고 너비가 7m다. 역사문화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용문십구품(龍門十九品)이라 부르는 비문이 잔뜩 새겨져 있다. 19개 작품 모두 조상기(造像記), 즉 불상 조성에 대한 기록물이다. 당시 왕족들이 앞다투어 비문을 새겼다.
정면에 석가모니와 두 보살이 있다. 어둡기도 하고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글씨가 보일 듯 말 듯하다. 북쪽 벽면에 북해왕원상조상기(北海王元詳造像記)가 있다. 높이 88cm, 너비 42cm 크기다. 어머니와 아들의 평안을 기원해 세웠다고 적혀 있다. 천도 후 탁발씨 선비족은 원(元)씨로 성을 바꿨다. 원상이 출연하는 정사가 있다. 위서 및 북사(北史)의 열전과 자치통감이다. 황제의 후비인 어머니 고초방이 주인공이다.
원상이 당숙의 부인인 왕비 고씨와 사통한 사건이다. 모반죄로 체포됐는데 심문 과정에서 드러났다. 고초방은 ‘처첩도 많고 모두 미모가 뛰어나건만 굳이 고려(고구려 의미) 여인과 사통을 저지르다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라고 아들을 욕했다. 곤장을 100대나 쳤다. 남편 관리 제대로 못했다고 며느리도 수십 대를 맞았다. 원상은 사형을 당했고 모반은 누명이 벗겨졌으나 죄상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고양동에도 이름을 남겼다.
고양동은 노군동(老君洞)이라고도 부른다. 도교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신성한 불교 성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도교 신인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서태후가 용문을 찾은 적이 있다. 이를 빌미로 서태후가 태상노군으로 바꾸라 했다는 소문이 전해온다. 불교 신자인 서태후의 명령이라 보기 어렵다.
청나라 학자가 저술한 숭낙방비일기(嵩洛訪碑日記)에 서태후 방문 전에 이미 석가모니는 사라졌다고 나온다. 1936년 고건축학자인 량쓰청이 방문했을 때 여전히 태상노군이 주인이었다. 청나라 말기 조정의 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서 도사들이 석굴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고 추정한다. 신중국 성립 후 석가모니로 복원했다.
이하에 유람선이 떠다닌다. 배를 타고 석굴을 보는 느낌은 어떨까 싶다. 침수교(浸水橋)를 건너 동쪽으로 간다. 동산에 있는 석굴은 모두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다. 중형 석굴이 약 20개이고 대부분은 조그맣다. 동산에서 보면 서산의 전모가 잘 드러난다. 멀리서 봐도 봉선사 석굴은 웅장하다. 개미집 같은 고양동과 빈양동도 한눈에 보인다. 점 찍은 듯한 불감도 많다. 문득 뱃사공이 지나다가 처음 석굴과 불상을 봤다면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 시대 이후에도 석굴이 확산됐다면 훨씬 멋진 모습이었을 듯하다.
동산석굴에서 입구 쪽으로 가면 향산사(香山寺)가 나온다. 산 중턱에 위치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경치가 아름답다. 수많은 석굴을 바라보게 된다. 석굴에 담긴 역사를 짚어가며 예술로 승화된 흔적을 되새겨본다. 그냥 돌산이 아니라 문화의 보고다. 여유로운 되새김이다. 많은 문인과 승려가 즐겨 찾았다. 청나라 건륭제도 다녀갔으며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피서를 즐기기도 했다. 백거이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별호처럼 마지막 여생을 즐겼다.
빈양동 쪽으로 시선이 강을 건넌다. 석굴 앞에서 볼 때랑 느낌이 다르다. 한발 떨어져 생각할 여유도 생긴다. 용문석굴 설명문 어디에도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북위에는 자귀모사(子貴母死) 제도가 있었다. 아들이 황태자가 되면 어머니는 죽는다. 외척의 득세를 염려해 만든 제도다.
황태자가 모반을 꾸미다가 폐위됐다.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새 수도인 뤄양으로 오는 도중이었다. 겨우 29살의 어머니 고조영이 죽음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슬펐을까? 황제로 등극한 후 자귀모사 제도를 폐지했다. 고씨 일가는 광범위하게 북위 황실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고조영의 오빠 고조는 외척 신분으로 실권을 잡았다. 고언, 고조, 고조영은 남매였다. 황제는 외삼촌인 고언의 딸 고영을 황후로 맞았다.
2021년 4월 용문석굴에서 황제와 황후의 예불도를 ‘부활’한 행사가 있었다. 똑 같은 자세와 복장으로 화려하게 소개됐다. 어머니를 위해 새긴 빈양동 예불도가 문득 보고 싶다. 실물을 보려고 미국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먼발치에서 1,500년 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강을 건너 석굴 속으로 끊임없이 눈길을 보낸다. 화려하게 치장한 황후의 예불 행렬이 환상처럼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