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상무부가 자국 내 생산 시설에 대한 투자 보조금을 받기 위해 따라야 하는 주요 규제인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 세부 규정을 공개한 것과 관련해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최악은 피했다"며 안도하고 있다. 미국이 이달 초 밝힌 반도체 보조금 지급 규정이 예상보다 깐깐하게 나오면서 가드레일 조항 역시 우려했던 것보다 불리하게 정해질 수 있다는 예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업 입장에선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장비 규제의 유예 기간이 10월로 끝나는 만큼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계는 전날 미 상무부가 발표한 가드레일 조항 세부 내용을 챙기면서 앞으로 있을 영향을 따져보고 있다.
미 상무부는 21일(현지시간) 공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안전장치) 세부 규정 안에서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10년 동안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증설하거나 10만 달러(1억3,000만 원) 이상 거래를 금지한다고 밝혔다. 어떤 기준으로 첨단 반도체를 나누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재 중국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첨단 반도체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양 사가 현재 중국 시안, 우시에서 각각 낸드 플래시와 D램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미 상무부가 밝힌 구형 반도체 공정(128단 미만 낸드 플래시, 18나노미터 초과 공정의 D램)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회사 전체 낸드·D램 생산량의 40~50%를 생산 중인 만큼 가드레일 규정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사업 구조가 대대적으로 개편될 위기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가드레일 조항을 두고 "우리 기업들이 현재 수준의 설비 운영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①'OO나노 이하 제품 생산 불가'처럼 기술 수준을 규제한 것이 아니라 반도체 생산량을 제한했다는 점과 ②반도체 생산량 기준을 제품의 용량 규모가 아닌 반도체 원판(웨이퍼) 투입량으로 정한 점 때문이다. 이에 똑같은 웨이퍼를 투입하더라도 반도체 기술력을 개선하면 반도체 칩의 크기가 줄어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다. 실제 웨이퍼 투입 증가분을 5%로 제한하더라도 5% 이상의 제품 생산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5세대 낸드 플래시에서 6세대로 넘어갈 때 생산성을 20% 이상 개선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중국에서 아예 제품을 생산하면 안 된다는 기준에서 첨단 제품을 5% 확장할 수 있다고 확대된 것으로 우리가 협상을 잘해 냈다"며 "국내 기업들은 중국 현지에서 계속적으로 반도체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도 "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하는 우리 기업의 경우 이번 가드레일에 따른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정부 역시 보조금 규정을 발표하고 업계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세면서 어느 정도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 정부는 반도체법의 세부 지원 계획을 내놓으며 반도체 시설 공개, 초과이익 공유 등의 기준을 내놓았다. 이를 두고 미국 내에서도 "이런 독소조항 때문에 삼성전자, TSMC를 비롯한 해외 기업들이 미 현지 투자를 중단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가 남아 있어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안심할 수는 없다. 미 정부는 지난해 10월 안보상 이유를 들어 D램은 18나노미터 이하, 낸드 플래시는 128단 이상 제조 장비를 중국 업체들에 팔려면 허가를 받도록 했다. 사실상 원칙적으로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장비 진입을 불허하겠다는 뜻이었다. 국내 기업의 중국 반도체 사업장도 적용받았는데 미국은 예외적으로 우리에게 1년간의 유예를 줬다.
유예가 연장되지 않을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상황은 복잡해진다. 이미 두 회사는 중국 내 50조 원에 달하는 투자를 집행했다. 반도체 장비 수출이 중단될 경우 해당 공장은 중장기적으로 구형 반도체 생산 기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번 가드레일 협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처럼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문제도 정부의 역할을 기대해야 하는 입장이다.
박 교수는 "우리 기업의 반도체 매출의 60%가 중국에서 발생하는 만큼 이를 못하게 하면 미국 수출도 사실상 어렵다"며 "미국의 반도체 자급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동맹국인 한국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적극 강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전문연구원도 "결국 이 문제는 각국 정상이 만나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우리 기업 입장에선 반도체 장비 규제가 걸려 있는 만큼 독소조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해 미국 정부의 계획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미중 갈등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제2, 제3의 가드레일 조항도 대비할 수 있도록 정부가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백서인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교수는 "일본이나 대만의 경우 정부가 기업의 요구를 정확히 듣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예외조항을 받아낸 경험이 있는 반면 아직 우리 정부는 이런 협상에 익숙지 않다"며 "10월 반도체 장비 규제 협상을 비롯해 앞으로 지속될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