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한 신이시여, 욕망을 갖게 하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죠. 이제부터 우린 영원한 적(敵)입니다, 영원한 적!"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부적 재능을 질투해 좌절을 거듭한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이렇게 절규할 때 객석은 숙연해졌다. 다음 달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바로 이 살리에리를 맡아 매 무대 혼신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배우 차지연(41)은 어쩌면 다른 배우들에게 모차르트처럼 질투의 대상일지 모른다. 탁월한 가창력과 연기력으로 뮤지컬 여배우 중 손에 꼽는 티켓 파워를 지닌 그의 무대 장악력이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무대 데뷔 18년 차인 그는 이번 살리에리 연기를 통해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고 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차지연은 '아마데우스' 국내 두 번째 시즌인 2020년 공연에 이어 이번 세 번째 시즌에 다시 출연하면서 새삼 "극장 출근길이 즐거워졌다"고 말했다. "첫 도전 때 엄청난 양의 대사에 치였다면 이번엔 살리에리를 처음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지점들을 발견하면서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 제 꿈에 좀 더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에요."
동시대를 산 실존 인물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한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1979년 런던 초연)을 바탕으로 한 연극의 러닝 타임은 2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살리에리는 대부분 장면에 등장해 극을 이끌어 간다. 2020년 처음 남성 역할인 살리에리에 남자 배우들과 함께 성별 구별 없는 '젠더 프리(gender-free)'로 캐스팅돼 화제를 모았던 차지연은 이번에도 김재범, 김종구, 문유강 등 남자 배우들과 번갈아 이 배역을 연기한다.
차지연은 어느새 젠더 프리 캐스팅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지만 2020년 당시 이지나 연출가의 살리에리 역 제안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학하는 스타일이어서 '네게는 남성 또는 여성이 아닌 제3의 인격체로서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이지나 선생님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며 "이번 공연에서도 한 달 정도 무대에 오른 최근에야 이지나 선생님의 절대적 믿음에 조금은 부응한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차지연은 외조부가 국가무형문화재인 박오용(1926~1991) '판소리 고법(고수)' 보유자로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 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돈을 벌고자 뮤지컬에 데뷔했기에 그에게 무대는 "다시 살게끔 해 준,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곳"이다. 하지만 지난해 그는 극심한 심적 스트레스로 배우로서는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그래서 이번 '아마데우스'는 "좋은 동료 배우들의 자극을 받고 자신감을 찾을 수 있게 된 작품"으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차지연은 최근 몇 년간 무대뿐 아니라 '복면가왕' 등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모범택시', '블랙의 신부' 등의 신스틸러로 등장,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카메라와 모니터를 거쳐 시청자와 같이 울고 웃는 방법을 배우고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시청자에게 좀 더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도 더 많이 출연할 생각이에요"
차지연은 '살리에리라는 인물이 무대에서 남자나 여자로서가 아닌 그냥 살리에리로서 존재하고 있음이 무척 좋았다'는 누군가의 관람 후기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체격이 커서 학창 시절 남자 같다고 따돌림을 당했다"며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장점으로 부각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남자 배우들의 꿈의 배역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타이틀 롤을 맡고 싶다는 그의 바람도 언젠가는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예전에 못했던 말 이제는 할 수 있습니다. 기회만 주시면 저, 잘할 자신 있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