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주변이 지금처럼 유동적인 적도 드물다. 다양한 변화가 동시다발로 진행돼 정신 차리고 관찰하지 않으면 그대로 휩쓸리게 된다. 미중 두 코끼리가 싸우는 기술과 교역, 군사에서 우리의 국익은 맞물려 있다. 안보 문제마저 겹친 우리로선 양자택일의 기로에 들어서고 있다. 이번 한일관계 개선이 미래를 위한 돌진으로 표현되는 것도 그런 점에서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장 주목할 변화는 일본의 지정학 귀환이다. 러시아 침공이 중국의 잠재적 대만 침공이란 경각심을 일본에 던진 것이다.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 영국과 군사지원협정, 미국 주도의 대중국 연합 참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이제 중국 러시아와 경쟁하는 군사강국으로 복귀 중인 일본이다.
일본의 지정학 등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건 성급하고 국민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본의 변화를 애국, 매국의 프레임으로 접근할 때도 아니다. 주일 미국대사 람 이매뉴얼은 오바마 정부 시절 국정운영의 핵이었다. 그는 당시 유행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레이코프 등 언어학자들의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정당, 정치의 왜소화가 언어적 프레임에서의 무능 때문이라는 진단에 대해 그는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무능을 가리는 위험한 처방이라고 반박했다. 정쟁, 말싸움 말고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조건과 정책을 짊어지라는 요구였다. 이매뉴얼 식대로라면 지금은 반일, 혐오의 기름기를 걷어내고 과거 같은 일방적이며 팽창주의적 면모를 갖추려 하는지 신중히 살필 시점이다.
이 전쟁 같은 외교의 시간에 성과를 따져보면 답답함만 더한다. 일본 정부 돈이 오고, 총리 사과가 있던 위안부 협상은 그래도 평가할 만했다. 졸속 비판을 받았어도 강제징용 해법에 비하면 갖추어진 밥상이었다. 문제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이는 되레 가벼워 보이는 데 있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표현된 대중국 전략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다. 대신 큰 맥락에서 안보와 경제가 하나로 통합되는 동맹 위주의 경제안보가 대체했다. 대통령의 이번 방일과 내달 방미 역시 그 연장선이고 과거 한국에 대한 의구심을 씻는 행보다. 우리의 접근법만 달라진 게 아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성장을 견인해온 당정 분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번 양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을 확정한 시진핑의 발언은 강철 만리장성 등 결기로 가득 찼다.
겉으로 으르렁대지만 한편으로 미중의 작년 교역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리창 신임 총리는 미중은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타협 기준은 국익일 수밖에 없다. 대결 일방으로 치닫는 듯 보이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를 발신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선의로 포장하면서 결정적일 때 자국 이기주의를 앞세우는 것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다. 과거 미일이 플라자합의에 서명하고 일본이 반도체 주도권을 내주어야 했을 때 양국 정상은 보수의 케미가 최고였던 레이건과 나카소네였다.
결국은 장기적 전략 없이 일방으로 질주하면 국익이 훼손되고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공교롭게 윤 정부 탄생과 함께 시작된 무역적자가 중국과는 5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미국에서도 핵 무장 등을 들어 문제 삼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국익보다 우선하는 게 없는 냉혹한 경기에서 너무 앞서가도 역동작에 걸려 골을 내줄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속담처럼 상대에 대한 잘못된 믿음, 과잉 기대야말로 금물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지정학적 특성을 제대로 고려한 외교가 이뤄지고 있는지 걱정이다. 외교의 시간인데 밥상 차려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