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그렇듯 어떤 음식은 잊고 있던 삶의 기억들을 순식간에 소환한다. 음식이 감각 기관들을 깨우고 몸속으로 들어올 때 예상치 못한 많은 감정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누구든 각자 '솔(Soul) 푸드'가 있다. 맛은 혀가 아니라 온몸과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외로운 혼밥을 하든 여럿이 떠들며 회식을 하든, 먹는 모든 순간은 삶이 위로받는 경건한 의식의 시간이다. 한 줄 김밥에도 만드는 사람의 정성을 읽어내고 감사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다.
나는 회식을 위해 맛집을 찾을 때 음식 맛과 쾌적함, 그리고 청결 사이에서 늘 고민한다.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집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주 맛을 포기한다. 평범한 맛이라도 쾌적하고 깨끗한 곳이 있으면 그리로 간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을 나누며 누군가와 어울리는 시간의 질이다. 맛집이라도 비좁고 불결한 곳이면, 나는 시간에 집중할 수가 없다. 결국 귀중한 삶의 한때를 허비하게 된다.
최근 찾아간 오래된 맛집 2곳이 그랬다. 소문대로 맛은 있었지만 객장은 종업원이 손님과 자주 부딪힐 만큼 비좁았다. 많은 노포들이 그렇듯, 2인석으로 적당해 보이는 테이블을 4인석으로 사용했다. 지인들과 밀착한 채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안, 가까스로 테이블에 걸쳐 있는 내 앞접시가 쏟아지지는 않을까 내내 불안했다. 그리고 화장실엔 세면대가 없었다. 한 곳은 소변기 아래쪽에 만지기 찜찜한 수도꼭지가 있었으나, 한 곳은 그것마저도 없었다. 세면대 없는 화장실이라니. 참 난감했다. 손님은 각자 알아서 찜찜함을 참든 말든 하겠지만, 주방 사람들은 화장실 다녀와서 손도 안 씻고 음식 만드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다닌 여러 노포들의 사정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곳들을 서민들의 정이 넘치는 곳이라고 포장하지는 말기 바란다. 오래된 곳이라고 쾌적하고 깨끗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주인의 의지가 없을 뿐이다.
내가 간 곳은 문전성시의 집들이니, 누구든 부러워할 만큼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충분할 테니 매출 욕심을 조금만 줄이고 객장의 밀도를 낮추면 안 되나? 그리고 영업을 며칠만 멈추고 화장실 리모델링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돈과 삶의 본질적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은 생각보다 자주 온다. 그때 가치를 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공동체는 더 풍요로워진다. 음식점의 본질적 가치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다. 손님을 매출 올리는 머릿수로만 세는 순간, 정성을 들이고 환대할 마음의 여지는 없어진다.
내 사무실이 노들섬에 있을 때, 단골로 다니던 노량진 학원가 식당이 있었다. 일대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학원생들을 위해 가격이 저렴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노부부는 주방에서 함께 일하다, 손님이 뜸해지면 꼭 테이블을 돌며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안녕하세요" "맛있게 드세요"라고 건네는 인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내가 대접하는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게 돈보다 더 큰 보상이라 여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음식점 주인의 진심 어린 환대와 손님의 감사하는 마음이 만나는 이런 순간이 흔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