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 '접근금지' 무시 일쑤, 피해자는 공포··· '신당역 살인' 반년, 달라진 건 없었다

입력
2023.03.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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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신당역 없다" 정부·정치권 공언에도
가해자 위치추적 등 관련 대책 입법은 '0'
스토킹 피해 여전... '제도 개선' 서둘러야

#1. “와장창.” 지난해 10월 초 부산의 한 주택가. 여성 A씨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현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남자친구 B씨가 현관문 유리창을 부순 것이다. 자정부터 밤새 100여 통의 전화와 ‘칼 들어간다’ 같은 200여 건의 협박성 문자메시지를 보내더니, 기어코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2주 전 법원은 스토킹을 일삼는 B씨에게 “A씨 주거지 100m 이내 접근 말라”(잠정조치 2호), “연락하지 말라”(3호) 등의 잠정조치를 내렸지만 가해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2. 1월 24일 오후 인천의 한 음식점. 50대 남성 C씨가 갑자기 들이닥쳐 옛 연인 D씨 목을 흉기로 찔렀다. 그는 경찰에 “스토킹 신고를 당해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D씨는 사건 당일까지 7번이나 C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 중 2건은 정식 수사로 이어져 C씨가 현행범 체포됐다. 하지만 경찰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D씨의 답변에 경고ㆍ분리 조치만 했다. 스토킹 범죄는 피해자의 의사가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한 반의사 불벌죄다. 소극적 수사가 참극을 막지 못한 셈이다.

'스토커 구금' 신청 늘어도 법원서 절반 기각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안타깝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다음 날인 지난해 9월 15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고개를 떨구며 한 말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그것도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 역사 안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된 초유의 사건에 정부도, 국회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법무부는 한 달 만에 반의사 불벌죄 폐지, 가해자 위치추적 등이 담긴 재발 방지책을 내놨고, 여야는 조속한 입법을 약속했다.

거기까지였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제도적으로 바뀐 건 별로 없다. 스토킹처벌법 개정 논의는 이제서야 시작됐다.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탓에 스토킹 피해자들은 매일 밤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작은 변화는 있었다. 수사기관은 스토킹 가ㆍ피해자 분리에 비교적 적극 나섰다. 13일 경찰청이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경찰의 잠정조치 4호(유치장 구금) 신청건수는 지난해 10월 151건, 11월 93건, 12월 77건, 올해 1월 84건으로 집계됐다. 신당역 사건 직전인 지난해 8월 53건보다 적어도 절반 가까이(45.3%) 늘어난 수치다.

그러나 마무리가 좋지 못했다. 지난해 10월~올해 1월 경찰이 신청한 잠정조치 4호 405건 중 법원은 219건(54.1%)만 최종 승인했다. 구금은 확실한 분리 조치이지만, 개인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는 만큼 법원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반면, 2호(접근금지), 3호(연락금지)의 법원 인용률(93.5%)은 높았다. 문제는 가해자가 대놓고 어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이후 판결이 확정된 스토킹 관련 사건을 분석해 보니, 법원에서 2, 3호 처분을 받은 가해자 61명 중 38명(62.3%)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법원 결정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찾아가는 가해자가 다수라는 뜻이다.

스토커 전자발찌, 5개월간 국회서 '쿨쿨'

인신을 구속하자니 법원이 꺼리고, 처분이 약하면 실효성이 없다. 제도적 해법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가령 접근금지 등 잠정조치를 내릴 때 가해자에게 ‘전자발찌(위치추적 전자장치)’를 채우는 방안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대신 ‘피해자 반경 1~2㎞ 내 진입’ 같은 특정 정보를 경찰 등에 알리는 방식이라 기본권 침해 비판도 덜하다.

법무부도 신당역 사건 한 달 뒤인 지난해 10월 이런 대책을 담은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11월 국회 제출→연내 통과’ 시간표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지난달에야 국회로 넘어왔다. 법무부 관계자는 “예산, 인력 등 세부 내용을 다듬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해명했다.

국회도 미적거리긴 마찬가지였다. 법제사법위원회가 소위원회를 열고 개정안 논의에 착수한 시점은 지난해 10월 26일. 이날 회의에 여야가 발의한 개정안 20개가 상정됐고, 법무부 입법예고안 역시 참고자료로 제공됐다. 더불어민주당 법사위 간사인 기동민 의원은 “국회가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가해자 위치추적 방안에서만큼은 여야 간 이견도 없었다. 법원 측이 조건부 석방제를 형사소송법에 규정해 다른 범죄까지 포괄하자는 확대 적용 의견을 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후속 조치는 없었다. 두 번째 회의는 넉 달 뒤인 지난달 20일 열렸다.

계속되는 반의사 불벌죄 '비극'

정치권이 손 놓고 있는 사례는 또 있다. 반의사 불벌죄 폐지도 같은 과정을 거쳐 불발됐다. 스토킹 혐의로 징역 9년을 구형받은 전주환은 합의 종용에도 피해자가 거부하자, 선고 전날 범행했다. ①합의를 강요하는 2차 스토킹이 뒤따르고 ②모든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반의사 불벌죄의 폐해를 극명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역시 법무부 개정안에 폐지안이 담겼다. 법사위서도 여야, 법원 모두 찬성했지만 반의사 불벌죄는 지금도 살아있다. 피해자 보호ㆍ지원 내용을 담은 피해자 보호법이 지난해 말 본회의를 통과한 게 성과라면 성과다.

법ㆍ제도 개선 작업이 지지부진하다고 해서 스토킹 피해가 줄지는 않는다. 이달 초 부산에선 100m 이내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고 전 여자친구 직장을 찾아가 흉기로 찌른 30대 남성이 검거됐다. 1월 대구의 한 노래방에서는 50대 주인 여성을 수차례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같은 50대 여성이 체포됐다.

조속한 입법은 그래서 중요하다. 가해자 위치추적은 법이 통과해도 위험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는 관제시스템을 구축하는 등의 실무 작업에 최소 1년은 필요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행 시점이 내년으로 미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신당역 사건 후 반년이 지났는데 입법이 이렇게 늦어지는 건 가해자에게 자신감을, 피해자에게 좌절감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반의사 불벌죄 폐지, 위치추적 도입과 함께 잠정조치 불이행에 대한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혜인 의원도 "반의사불벌죄 폐지, (피해자가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원에 보호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피해자 보호명령 제도 신설 등 제도적 미비점들이 신속히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준석 기자
김소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