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가 사실상 끊겼다.” 영화인들이 요즘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투자배급사들이 어떤 시나리오나 기획 안이든 손사래 치기 일쑤라는 의미다. K콘텐츠가 인기 절정이라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영화계 투자 가뭄은 예견됐다. 코로나19 후유증 탓이 크다. 2020년부터 극장 관객이 급감한 후 영화 투자 역시 급속히 줄어들었다. 극장에서 돈을 벌 확률이 낮으니 지갑을 열 가능성이 작아졌다. 투자배급사들이 3년 동안 극장에서 투자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점도 악영향을 줬다. 만들어놓고 극장가에 선보이지 못한 ‘재고 영화’까지 적지 않게 있다. 돈줄이 말라가는 상태에서 시장까지 어려우니 누가 투자에 적극 나설까.
업계 최고 큰손으로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CJ ENM의 심상치 않은 사정이 먹구름을 더 짙게 하고 있다. CJ ENM은 연초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9개 사업본부를 5개로 줄이고, 국장 보직을 없앴다. 사실상 구조조정이었다. CJ ENM은 지난해 매출액이 4조7,922억 원이었다. 2021년보다 34.9%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은 53.7% 감소했다. 순손실은 1,657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경영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지난해 미국 제작사 피프스시즌(옛 엔데버콘텐트)을 1조 원가량에 인수하면서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크게 줄었다는 분석이 따르기도 한다.
업계 1위 기업이 지갑을 닫으면 전반적으로 투자 환경이 악화하기 마련이다. 영화인들은 올해도 걱정이지만 내년은 더 걱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투자 경색으로 새 영화 제작이 급감해 극장가에 내놓을 ‘신상품’이 없는데, 관객을 극장으로 부를 수 있겠냐는 거다. 투자 악화→신작 제작 감소→관객 감소라는 악순환 고리가 이미 형성됐다는 어두운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 제작사들이 OTT에서 활로를 찾자는 말은 공허해지고 있다.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가 국내 제작사에 주는 제작 수수료(Production Fee)는 제작비의 10~20%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근 1년 사이 이 수치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고 한다. OTT가 지식재산권(IP)까지 가져가 추가 수익은 사실상 봉쇄돼 있다. 영화계가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다.
최근 투자 악화를 일시적 현상으로 볼 수 없다. 국내 영화계는 김영삼ㆍ김대중 정부를 거치며 산업화를 이뤘다. 김영삼 정부가 비전을 제시하고, 김대중 정부가 이에 맞게 정책 지원을 하면서 영화계는 2000년대 부흥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매체 융합, OTT 활성화 등에 따라 새판이 짜이고 있다. 김영삼ㆍ김대중 정부가 형성한 영화 산업 틀을 바꿀 때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제4차 수출전략회의에서 K콘텐츠와 K푸드 수출 확대 전략을 집중 논의했다. 유명 배우 박성웅이 발표에 참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K콘텐츠가) 전후방 연관 효과까지 고려하면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수출 확대는 '상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제작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투자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격변기에 맞게 거시적 지원 정책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 아직은 구체적인 정부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늘 그렇듯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