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직도 자신을 ‘중독자’라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마약을 끊은 지 17년이 된 사람이다. ‘이 정도면 마약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틀렸다. 한번 맛 들인 마약의 힘은 섬뜩했다. “중독은 죽어서도 끝이 안 난다고 생각될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는 장담한다. “(중독에서) 분명히 회복할 수 있다”고. 그의 인생이 그걸 증명한다. 15년을 마약 중독자로 살았지만, 지금 정반대의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으니까. 그는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이 늪에서 헤어 나오도록 돕는다. 이 일을 하려고 학사부터 시작해 석사 학위를 따고, 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다. 중독자라서 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반전의 인생을 살기까지 쉽지 않았다. 골방에 4년이나 틀어박혀 필로폰만 하며 살던 시절이 있었고, 구치소에도 두 번 다녀왔으며, 이른바 ‘일수 도장’ 받는 고리대금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마약 때문에 탕진하기도 했다. 중독자로 살았을 때 세상은 지옥이었다. 지금도 하루에 열두 번씩 마약이 생각나지만 참는 이유다.
그는 종종 지옥 이전의 삶을 떠올린다. 죽을 만큼 패는 알코올 중독자 형을 피해 홀로 살지 않았더라면. 중학교 시절 축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매질이 아니라 “해보라”고 격려해줬더라면. 대마초나 필로폰을 놀이쯤으로 여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마약으로 잃어버린 건 내 (젊은 시절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삶을 두고 ‘실패’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실패연대기의 끝은 ‘행복’이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얘기들은 무엇 하나 예측 가능한 게 없었다. 그래서 펄떡거렸다.
마약 중독자이자 회복자 한부식(56), 그가 써가고 있는 ‘희망연대기’의 시작은 이렇다.
“우리 때는 흔했어예.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이 대마초를 갖고 와가 한 거지예. 고3이 되니까 ‘히로뽕’(필로폰)을 주더니 한번 해보라 카데예.”
하필이면, 경남 밀양의 가족 곁을 떠나 부산에서 혼자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의 나이 불과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스무 살 차이 나는 형은 부모에, 어린 그까지 때려댔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부친이 논까지 팔아 대준 장사 밑천을 다 날려먹고선 매일 술이요, 술만 마시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보다 못한 모친이 그를 살리려 부산으로 유학 보냈다.
대도시 부산에 가니, 자꾸만 기가 죽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자신은 그저 ‘밀양 촌놈’이었다. 어머니는 1년 가야 한두 번 얼굴 보러 오는 게 고작이었다. “부식아,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노. 니 땜에 살지. 지금처럼 공부해가 판·검사 돼야 한데이.” 머리로는 어머니의 심정을 알았지만, 현실은 외롭고 서러웠다. 버려진 기분, 그거였다. 어머니는 멀었고, ‘깡패’ 친구들은 가까웠다. 그의 자취방은 그들의 놀이방이 됐다. 중학교 때 술과 담배를 배웠다. 공부보다 주먹질이 위로였다. 다른 학교로 원정까지 다니며 싸움을 했다.
“고1 때쯤 됐을 거라예. 친구들이 방에 놀러 와서 대마초를 하는 거라예. 뭐 별것도 없더라고예.”
친구들 따라 플라스틱 요구르트 병으로 해본 게 마약의 시작이었다. 고3이 돼선 필로폰까지 맞았다. 대마초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부터 시작된 거라예.”
그래도, 그때는 필로폰을 맞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는 아니었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덜컥 겁도 났다. 때마침 군대라는 ‘대피소’가 있었다. 서둘러 지원해 입대했다.
군 복무 30개월 중 28개월을 잘 버텼다. 필로폰 따위는 잊어버리고 살았다. 제대를 두 달 앞두고 나간 말년 휴가 전까지는. 또 친구들이 문제였다. “우연히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어예. ‘친구야, 휴가 나왔나’ 해가 같이 술 한잔 먹다 또 히로뽕을 맞은 기라예. 우리끼리는 ‘한 짝대기’라 카는데, 히로뽕을 주사기에 하나 담아가 한 짝대기 부대에 갖고 들어간 거라예.”
약을 맞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불침번 ‘말뚝 근무’를 자처했다. 제대할 때쯤엔 금단 증상이 나타났다. 불안하고 툭하면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쫄따구를 두드려 패기 시작한 거라예. 그것도 가둬 놓고.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를지 몰랐어예. 그때까지 군에서 누구를 때려본 적이 없거든예.” 성탄절을 앞두고 그에게 온 우편물 일부가 없어진 게 화근이 됐다. “아들을 집합시켰는데 안 온 아한테 ‘이제 말년이라고 안 오냐’면서 뚜껑이 열려 막 팼어예. 지금도 죄책감이 들고 너무 미안해예.”
그는 35년 전 자신을 돌아보며 말한다. “그때 이미 마약 때문에 충동조절 장애가 생긴 거라예. 한번 화가 나면 ‘스돕’(스톱)을 몬 해요. 그때는 그걸 몰랐어예.”
마약은 서서히 그를 망쳐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군을 제대했다. 집에 돌아갈 생각하니 걱정부터 앞섰다. 환갑을 훨씬 넘긴 어머니가 노점상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결심했다. ‘돈 되는 일은 다 해야겠다.’
맥주 공장에 가서 병을 나르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다.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언제까지 일용직 노동만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지인이 “일수 일을 해보겠느냐”고 했다. 말하자면, 고리대금업이다. 수완만 좋으면 한 달에 버는 돈이 꽤 된다고 했다. 솔깃했지만, 입사비가 있었다. 일수 이자를 들고 도망가는 걸 막으려 입사할 때 회사에 맡겨두는 보증금 같은 돈이다. 그간 모아 놓은 돈 1,000만 원에다 아버지에게 빌린 200만 원을 더해 입사비를 마련했다.
수금 첫날, 그에게 주어진 관할구역은 부산 남천동부터 광안리, 민락동, 수영로터리까지였다. 모두 40계좌, 그러니까 40명한테 들러 일수 이자를 받으면 됐다. 간간이 홍보 명함도 뿌리면서. 그런데 첫날부터 사고가 났다. 작은 화장품 가게 여자 주인이 오후에 오라더니, 오후에는 다음 날 오라며 버텼다. “결국 쌍욕을 해가며 싸워서 돈을 받아냈어예. 버스 타고 집에 가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예.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싶고.”
다음 날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했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흘렀다. “월급 타고 나니까 이제 할 만하더라고예. 거친 말도 입에 착착 달라붙고.” 요령도 생겼다. 한 달에 600만 원까지 손에 쥐게 됐다. 일취월장한 그에게 사장이 “사무실을 대신 맡아달라. 내 막내 동생만 먹고살게 해주면 된다”라고 제안했다. 어차피 실무는 그가 꽉 잡고 있었다. 직원이 32명이었으니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사장은 실무에서 손을 떼고 그가 사무실을 이끌기 시작했다. 버는 돈의 규모도 커졌다. 돈이 생기니 사달도 따라왔다.
“양정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는데 거기가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라예. 거기서 깡패 짓하던 중학교 동창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 거라예.”
인사로 건넸던 “친구야, 사무실 한번 놀러온나”란 말이 그런 결과로 이어질 줄은.
“이 친구들이 내가 돈 좀 버는 걸 아니까, 돈을 빌려 달라 카는 거라예. ‘가게 할라 카는데, 돈 좀 대주면 안 되겠나’ 그럼 바로 돈을 내주고 하니까 친구들이 고맙잖아요. 그러니까 약을 주고 가는 거라예. ‘이거 써라’ 카믄서. 내가 또 그걸 받아가 어느 새 하고 있는 거라예.”
한동안 놓았던 필로폰이었다. “할 건가, 말 건가 고민도 안 들었어예. 경제적으로 성공했으니까 간이 커진 거라예. ‘내는 이제 이런 거 정도는 해도 된다’ 카는. ‘이런 거는 돈을 많이 번 내 정도 되니까 하는 거지 일반인들이 할 수 있겠나’ 그런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거라예.”
약이 떨어지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친구야, (필로폰) 좀 갖고 온나.” “없다.” “없는 게 말이 되나, 빨리 구해봐라.” 고작 며칠을 참기 힘들어졌다. 욕을 하고 협박을 하다, 나중엔 사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독된 것이다. 구해달라는 필로폰의 양도 많아졌다. 돈을 떼이기도 했다.
“그러다 첫 징역살이를 간 거라예. 생각해보믄, 아마 그때 내가 약 하는 거는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든 거 같애. 근데 잡히기 전까지 나는 히로뽕을 하는 게 죄가 아닌 줄 알았어예. 단순하게 내가 내 돈 갖고 하는 거고,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런 거지예.”
1997년이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보호관찰 2년까지 선고받고 45일 만에 풀려났다.
“그런데예, 45일 만에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또 약을 하대예. 집에 와선 남아있는 약부터 찾고 있더라고예.”
이제는 가족이 눈치 채기 시작했다. 함께 살던 어머니다. “어쩌다 집에 가믄, 엄마가 ‘부식아, 니 또 약 하나. 니한테서 약 냄새 난다’ 그래예. 그때는 이미 내 걱정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저 싫은 소리로 들리는 거라. ‘이 할마씨가 돌았나’ 카믄서 막 컵 집어 던지고 싸우기 시작하는 거라예.”
결국 그는 그 길로 집을 나왔다. 여관살이가 시작됐다. 10년이나 이어질 줄 그는 알았을까.
“여관도 한 서너 군데 돌아요. 잡힐까 봐. 전전하면서 약을 하는 거지예.”
모아놓은 돈이 온전할 리 없다. 일수 사무실도 예전 같지 않았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그만두더라고예. 당연한 거지예. 지금 생각해보니까, 직원들 입장에서도 내하고 같이 회사 댕겨서는 답이 없잖아예. ‘뽕쟁이’인 거 다 아는데. 그만두는 게 당연하지예. 일수 사무실은 직원들이 그만두면 자기가 관리하는 고객도 데리고 나가거든예. 그러니까 회사에는 ‘깡통 계좌’만 남게 되더라고예.”
결국 그는 드문드문 나가던 사채업 사무실도 접었다. 전 재산을 들고 나가 필로폰을 샀다. 그러곤 골방에 틀어박혔다. 4년을 마약만 하며 지냈다. “돈이 떨어지니까 나중에는 밥도 굶었어예. 예전 수금 안 됐던 데 전화해가 한 100만 원 들어와도 밥 안 사묵고 약 사고. 막판에는 한 사흘을 굶은 적도 있어예. 근데 사람이 그렇다 아입니까. 슈퍼라도 가서 외상으로 갖다 먹으면 되는데 그걸 몬 해예.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능이 스돕되는 거라예. 악만 남고. ‘내가 기회만 되면 한 놈은 쥑일 기다. (빌려주고 못 받은) 내 돈 3억만 있으면 이래 있지 않을 텐데’ 이런 생각만 하는 거라예.”
2006년 어느 날 골방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택배 왔습니다.” 배송 기사일 리가 없었다.
“느낌이 오더라고. 잡으러 왔는갑다. 올라믄 좀 빨리나 오지 싶더라고예.”
문을 여니 경찰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부식씨, 맞지요?”
“뭐, 이 빙신 같은 거 잡으러 오는데 이리 많이 옵니까.”
“아니 한부식씨, 와 이래 됐습니까.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뭐 이런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소변 검사부터 좀 하입시다.”
두 번째로 경찰에 잡히던 날을 그는 생생하게 재현했다.
구치소에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안에서 가만 생각해 보니 경찰이 어떻게 알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해졌다. 수사기록 열람·등사 신청을 했다. 검찰청에 가서 수사기록 첫 장을 넘겼다. 본인 사진이 나와야 하는데, 다른 사람 얼굴이 붙어 있었다.
“부장님, 이 서류 잘못됐습니다. 내 꺼 아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봐라, 한부식씨. 당신 맞다.”
사진 속엔 환갑도 더 된 듯한 노인이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긴, 자신의 얼굴을 직시한 게 거의 10년 만이었다.
“미치겠는 거라. 뒷장은 보지도 못 하겠더라고예. 그냥 덮었어예.”
구치소에 돌아가 앉아 있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서럽고 서러웠다. 구치소에서 만난 선배가 그를 붙잡고 말했다.
“니 이제 알았나. 나 니처럼 그래 약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끊어라, 이제 쫌.”
“우째 끊어야 하나. 방법을 모르겠다.”
“병원에 가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보호관찰 3년형을 받고 출소했다. 병원에 가라는 선배의 말만 머릿속에 남았다. 부산구치소를 나와 다리를 건너니 누나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식아, 엄마가 아파가 병원에 있다.”
“왜.”
“엄마 돌아가실랑갑다. 치매도 오고. 인자 몸이 마비가 돼가 얼굴만 살아 있고 그렇다.”
“그랬나…”
“병원에 입원하자. 엄마 있는 병원 위에 정신병동도 있다. 거기 들어가자.”
“알았다, 가자.”
“엄마가 니 몬 알아볼 수도 있데이. 울지 말고. 엄마 놀랜다.”
“알았다.”
누나들이 틀렸다.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알아봤다. “아들 왔네, 우리 아들이다!” 누나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거듭 확인했다. “엄마, 야가 누꼬?” “부식이!” 그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가 찾아간 병원은 경남 창녕에 있는 국립부곡병원이었다. 이곳은 마약류 중독자 치료보호기관이다. “입원하기 전날 누나 집에서 하룻밤 자는데 문득 병원비 생각이 나더라고예. 누나들이 돈 대준다고 걱정하지 마라 카는데, 그때 구치소에서 선배가 해준 말이 생각나더라고예. 국립부곡병원에 가면 공짜로 치료해준다고.”
무료라는 한마디 때문에 국립부곡병원에 간 건데, 그 발걸음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당시 국립부곡병원 원장은 약물 중독 치료·재활 분야 권위자인 조성남 법무부 국립법무병원장이었다. 그는 조 원장을 붙잡고 “어떻게 해야 약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할게예” 약속부터 했지만, 병원 생활은 초심 같지 않았다.
“반성은 잊어 버리고 옛날 습관대로 병원에서 ‘대장질’하는 거라예. 사소한 일로 싸우고, 간호사들한테 시비 걸고, 처우에 대한 딴지나 걸고. 그러다 한 놈을 두드려 팬 기라예.”
정신을 차려보니 막막했다. 병원에서마저 쫓겨나면 갈 곳도 없었다. 나이 먹어 누나들한테 손 벌리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심경이 복잡해지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와 피해자 사이를 조 원장이 중재했다. 고소하겠다는 피해자를 어르고 설득했다. 대신 피해자의 요구대로 그를 분리해, 알코올 병동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게 계기라면 계기다. 중독의 실체를 목도하게 된.
“친구가 있었는데 함께 아침 밥 먹고 등산까지 다녀왔는데 점심 밥 먹기 전에 갑자기 ‘내 퇴원이다, 이제 간다’ 하고 가는 거라예. 속으로 ‘저 놈 웃기네’ 하면서도 마음이 좀 그래요. 옆에 있던 아저씨가 ‘저 놈아, 저거 술 먹을라고 그러는 거 아이가. 쫌 있으면 온다.’ 진짜 사흘쯤 지나니까 술이 떡이 돼가지고 와선 사람을 몬 알아봐요. 나가자마자 술을 다시 마시는데 이게 스돕이 안 돼가 계속 먹다가 잡혀온 거라예. 그때 뒤통수를 턱 맞은 기분이더라고예. 이게 중독인갑다, 하고.”
입원한 지 6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달라졌다. 치료ㆍ재활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원장이 알아차리곤 대구 마약퇴치운동본부 워크숍에도 그를 데려갔다.
어느 날 원장이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대학 가라.”
원광디지털대학 중독재활복지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병원에서 복도에 놔준 컴퓨터로 입원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 다가온 퇴원. 처음엔 불안했다. 그래도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디뎌야 했다. 일단 외출증을 끊어달라고 해 지낼 곳과 일터부터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갈 곳은 없었지만 가지 말아야 할 곳은 확실했다. 마약에 손대게 된 부산만은 아니어야 했다. 옛 친구들을 만날 만한 곳도 피했다. 그래서 간 곳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해다.
무작정 공단으로 갔다. 일할 사람을 구하는 식당이 보였다. 숙식 제공도 해준다고 적혀 있었다. 그럼 됐다. 한 달 월급 130만 원. 식당 옆 컨테이너에서 지내면 됐다.
병원으로 복귀해 퇴원 날짜를 받아 두고 그는 간호사에게 부탁부터 했다. 병원에 맡겨 뒀던 휴대폰을 버려달라고. 그 안에 옛 친구들 연락처와 장부가 있었다. 과거와 단절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만들었다.
-퇴원한 후 어떻게 지냈나요.
“제가 일했던 식당이 공장에 밥 배달하는 식당이었거든예. 공장 사람이 그러더라고예. 밤에 다른 일 하는 거 없으면 트럭 운전하라고. 식당 사장한테 물어보니까 해도 된다 카데예. 그래가 식당 배달에 트럭 운전까지 하니까 한 달 수입이 300만 원으로 늘어나대예. 그동안 내 힘들 때 모른 척하던 자형도 화물 터미널에서 짐 나르는 일을 소개해주고. 그게 아주 ‘꿀 알바’예요. 그 일까지 하니까 이래저래 한 달 수입이 600만 원까지 늘어나더라고예. 일 안 할 때는 컨테이너에서 공부만 했어예. 씻는 것도 밤에 사장님 퇴근하면 물을 데파가 화장실에서 씻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회복지사 1급을 땄다. 원광디지털대 중독재활복지학과를 만든 고 주일경 교수가 그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했다. “너처럼 성적이 그렇게 많이 오른 학생도 드물다. 나도 중독자 제자한테서 (성공) 스토리 좀 만들어 보자.”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심어준 것이다.
-돈을 벌면서 계속 학업을 이어간 거군요.
“석사 한 학기를 하고 식당 일은 그만뒀어예. 그리고 공구 장사를 시작했지예. 그게 짭짤하게 잘 됐어요. 공구 장사까지 7년 동안 돈을 꽤 모았어예. 돈 모으는 재미를 그때 처음 알았어예. 지금도 제가 중독자들한테 그래요. 3년만 술도, 약도 끊고 버텨보라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나는 그랬다고.”
-체험한 기적이 뭐였나요.
“내가 바뀌니까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기 시작하데예. 자연스럽게 신뢰가 생긴 거지예. 식당에서 3년 동안 일하면서 결근을 한 번도 안 했어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냥 일을 하니까 얼마나 믿음직스럽겠어예. 그러니 주변에서 그걸 보고 일을 맡긴 거지예. 그게 되더라고예. 처음엔 갈 데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는데. (내가 변하기 시작하면 나를 돕는) 어떤 위대한 힘이 있나 싶더라고예. 그 전에는 내 돈 빼뜰라 카는(빼앗으려고 하는) 놈밖에 없었는데.”
그는 가야대에서 사회복지상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지금은 인제대 사회복지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뿐만 아니다. 중독자 재활시설인 경남 김해 다르크(리본하우스) 원장이다. 다르크는 ‘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DARC)’의 약자로, 중독자들이 운영하는 민간 약물중독재활시설이다. 일본엔 90곳이나 있지만, 우리나라엔 4곳뿐이다. 그가 하던 약물 중독자 자조 모임(NAㆍNarcotics Anonymous)에 일본 다르크 시설장들이 방문해 그런 시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중독자들의 회복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나요.
“일본에 가서 한 달간 다르크 시설 여러 곳을 돌면서 입소자들과 함께 생활해봤어예. 그때 ‘이게 되는구나’ 느낀 거지예. 일본은 시설장뿐 아니라 스태프도 다 중독자라예. 중독자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도 저 사람(시설장)처럼 되는 게 꿈이다’ 하는 거라예. 한국에 와서 해볼라꼬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지예.”
그간 모아둔 돈으로 김해 외동에 단독 주택을 구했고, 2020년 4월 정신재활시설로 신고했다. 김해 다르크(리본하우스) 원장으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연인원으로 따지면, 그간 40여 명의 중독자가 이곳에서 생활했고 그중 4명이 회복했다. 후원금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운영비 대부분은 사비로 충당한다. 한 달 입소비로 18만 원을 받지만, 시설 운영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 예산 지원의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마약으로 많은 걸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그렇죠. 결혼도 못 했어예. 아니, 하기는 했지예. 약 할 때는 결혼하면 약을 끊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예. 안 되겠더라고예. 너무 무섭더라고예. 일주일 만에 ‘나랑 살다가는 니 인생 절단 난다. 집에 가라’ 했어예.”
-당시 마약 때문인 걸 아내는 알았나요.
“끝까지 몰랐어예. 내가 말을 몬 하겠더라고예. 그때 차라리 깨끗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으면 됐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내 가족들한테 진짜, 정말 큰 죄를 졌지예. 우리집을 풍비박산 낸 거나 마찬가지니까. 어느 면으로 봐도,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가 됐으니까.”
-중독이 되면 가장 먼저 가족이 떠난다고요.
“그게,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도 가족인데 가장 먼저 떠나는 것도 가족이라예. 가장 힘드니까. 가족들이 볼 때는 ‘술만 끊으면, 약만 끊으면 멀쩡한데 왜 몬 끊노’ 이렇거든예. ‘니 의지가 약해서 그러는 거 아니가’ 그러는데 이게 의지 문제가 아니거든예. 그럼 중독자한테는 비난하는 걸로 들려예. 불화가 생기고 그러다 가족이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지예.”
-마약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뭔가요.
“내 자신을 잃어버렸지예. 내가 하고 싶은 거 몬 하고 산 게 제일 후회돼예. 돈을 벌면 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줄 알았는데, 약 때문에 몬 하게 되더라고예. 생각해보믄, 제일 힘든 게 어릴 때 하고 싶은 거 몬 한 거. 제가 축구를 정말 잘 했거든예.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어예. 제가 공을 잡으면 아무도 못 따라올 정도로. 아버지한테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 보내 달라꼬 했더니 두드려 패더라고예. ‘돈이 어딨노. 쓰잘 데기 없는 소리 마라.’ 지금도 제가 그래예. 그때 운동했으면 아마 ‘황선홍이가 잘하나, 한부식이가 잘하나’ 했을 거라고.”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마약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언제 들던가요.
“전혀 안 해예. 나는 아직 마약의 영향력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거 같아예. 요즘도 약 생각이 나지만, ‘그런갑다’ 하고 지나가는 거지예.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어예, 문득문득.”
-그렇게 생각나는데도 그걸 참게 만드는 힘은 뭔가요.
“중독자로 살 때 지옥이었거든예. 그 지옥 같은 세상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예. 내가 10년을 돌아다니면서 외톨이로 약을 하면서 살았어예. 전포동 꼭대기 골방에 처박혀서 (약 하면서) 살 때 4년을 똑같은 옷을 입고 살았더라고예. 출소한 뒤에 방을 정리하려고 가니까 방에 2002년도 달력이 걸려 있더라고예. 그때가 2006년이었는데. 햇빛도 안 들어오고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그 방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예. 그저 약 기운으로 산 거지예.”
-마약을 끊으니 달라진 것은요.
“편하잖아요. 이제 다른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고. 관공서도, 경찰서도 마음대로 갈 수 있잖아예. 약할 때는 생각도 못한 일이거든예. 동사무소도 못 가서 오죽하면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운전면허도 취소돼 있더라고예. 일주일을 못 참아요. 중독이 그런 거라예. 지금은 불안, 초조 이런 감정이 없어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싹 없어졌어예. 마음도, 육체도 편한 게 제일 좋아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실패를 자신만의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뭘까요.
“실패도 하나의 경험인 거 같아예. 그때는 진짜 힘들고 아팠지예. 마약 때문에 (인생이) 망한 거니까. 그런데, 그 경험을 되살려서 지금 잘 살고 있잖아요. 지금 내가 행복하니까. 요즘 마약퇴치본부나 관련 기관에서 종종 발표를 부탁하거나 특강을 요청하거든예. 한번은 전북 전주까지 갔어예. 서울보다 더 멀더라고예. 하하. 갔더니 조성남 원장님이 앉아 계시는 거라예. 원장님만 보면 옛날 생각이 나고 그렇게 눈물이 나예. 원장님은 내를 흐뭇하게 보는데. 그런 상황들이 참 좋아예. 옛날 생각하면, 내가 어디 원장님하고 그런 자리에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행복하다는 말씀이 참 듣기 좋네요.
“행복해요. 원장 아입니까.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구나 싶어예. 요즘요, 제가 인기 강삽니데이. 창원, 부산에서는 난리가 났어예. 하하. 대구에서 40명 앉혀 놓고 강의를 하는데, 한 명도 안 조는 거라예. 너무 재밌대예. 그런 강의를 가면 꼭 나한테 전화가 와예. 명함에 적힌 후원 계좌로 돈을 보내주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게 재미지예. 예전엔 몰랐던 것들이고. 모든 가치를 돈에 뒀거든. 너무 어려운 환경에서 크다 보니까 돈을 버는 데는 귀천이 없다, 어떻게든 벌기만 하면 된다 이랬어예. 일수하면서 사람들한테 줬던 상처가 한 번씩 생각이 나예. 그럼 죄책감이 들어. ‘아, 사람 직업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일수를 안 했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나’ 싶어예. 그때 큰돈을 번 게 나한테는 독이었지예. 그렇게 악랄하게 버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현재만 보려고 노력해예.”
-마약 중독 전력이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편견도 느끼시나요.
“많지예. 그래서 내를 모르는 사람들한테 드러내는 걸 안 좋아해예. 대학원 다닐 때도 과거를 아예 말 안 하고 살았어예. 시설 열고 나서 (원우) 세 사람한테만 알렸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예. 솔직히 내가 회복자가 아니고 평범한 정신건강사회복지사였더라도 이렇게 예산 지원을 안 해줄까 싶어예. 특히 전문가라는 사람들한테서 편견을 느낄 때 제일 서러븐 거라예. 그래서 우리 다르크 원장들끼리 그래요. ‘우리가 잘 몬 하면 우리 후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우리가 잘 해야 한다’고. 중독자 출신이라 그렇다는 편견을 고착시키기 싫어서예.”
-마약 때문에 겪은 인생의 실패가 알려준 삶의 도는 뭘까요.
“버티는 거지예. 그냥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 같아예. 짧게고, 굵게고 그런 건 필요 없어예.”
버티고 살아 남아서 만든 희망이다. 중독자로 산 15년 동안 한 필로폰의 양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고 그에게 물었다. 바로 계산이 나왔다. 족히 얼마쯤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건 추산이 불가능할 거다. 마약을 끊은 지난 17년간 그가 얻은 행복의 양 말이다. 하물며 앞으로 느낄 행복의 양은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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