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공개한 반도체 보조금 지원 조건을 보며 무릎을 쳤다. 겉으로는 동맹을 외치면서 돈과 힘을 무기로 압박하는 이중성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트럼프 행정부가 국내 기업들에 반덤핑 관세 폭탄을 던질 때도, 지난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국내 자동차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도 충분히 목도했다.
눈에 들어온 건 초과이익 환수 조항이었다. 수익이 전망치를 상당히(significantly) 초과할 경우 보조금의 75% 한도 내에서 환수한다는 내용이다. ‘줬다가 뺏는’ 것이 황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무릎을 친 건, 우리나라도 저런 정책을 써야 하는 건데 싶어서였다.
반도체가 절실하기로는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수출로 먹고사는 소규모 개방경제 나라이고 반도체가 그 수출의 20%를 차지한다. 반도체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지만, 그건 긴 안목의 얘기다.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낙오되는 걸 방치해선 안 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다른 나라처럼 반도체 지원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재벌 특혜’라는 견고한 프레임 때문이다. 이념적인 문제만도 아니다. 산업 형평성 문제도 있다. 왜 반도체만 지원을 해주느냐는 아우성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산업이니까, 전략산업이니까 등으로 설명할 순 있겠지만, 그 혜택이 특정 대기업에 집중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이런 식이면, 우리는 대기업이 영위하는 주력산업은 어떤 것도 제대로 지원할 수가 없다. 지원을 한다 해도 ‘찔끔’에 그칠 수밖에 없고, 그러니 효과도 미미하다. 욕은 욕대로 먹는다. 누구나 반도체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지원은 못하는 이 딜레마를 풀 해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반도체 투자에 대해 50%든, 70%든 아주 화끈하게 세액공제를 해준다. 미국처럼 보조금도 파격적으로 지원하고, 수도권에 공장 증설도 허용해 준다. 단서가 있다. 특혜로 투자를 늘려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나라에 환원해줄래? 수도권에 공장을 짓도록 해줘서 파괴된 지역균형발전은 어떻게 회복해줄래?
삼성전자도 SK하이닉스도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공통 해법을 찾아낸다. 그리고 국민 동의를 구한다. 대한민국은 깎아준 세금과 보조금을 다시 환수하고 반도체라는 대표상품을 지켜낼 수 있으니 득이고, 해당 기업들은 초과이익을 토해내도 기술력을 끌어올려 글로벌 경쟁력을 높였으니 득이고, 국민들은 수출 증가로 경기가 좋아지니 득이다. 누구 하나 손해 볼 것 없는, 모두에게 ‘윈-윈의 묘수’ 아닌가.
굳이 특혜를 환원하지 않아도 낙수효과가 있지 않느냐 운운하지는 말길 바란다. 설령 낙수효과가 있다 쳐도, 가장 많은 혜택은 해당 기업이 누리는 것이고 국민들은 그저 떡고물 정도를 받아먹는 것이니까. 그 정도로는 ‘재벌 특혜’ 프레임을 깨기 어렵지 않겠는가.
정부는 야당에 ‘K칩스법(조특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읍소하지만, 이 법이 통과된다고 반도체 경쟁력이 확 올라갈 리 없다. 추가로 뭘 내놓는다 해도 공무원들 서랍 속에 있는 그렇고 그런 뻔한 대책에 그칠 것 같아 현실 가능성 없는 상상을 해봤을 뿐이다. 그래도 그냥 흘려듣지는 않았으면 한다. 미국도 저렇게 악을 쓰는 마당에, 우리도 이전에는 경험하지 않았던 조치가 필요할 때 아니겠는가. 뭐가 됐든 삼성이, 또 SK가 떳떳하고 화끈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해법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