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림 복원 대신 관광용 케이블카... 가리왕산의 비애

입력
2023.03.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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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평창동계올림픽 직후 '자연생태 전면 복원' 합의에도
지역 주민·단체들 올림픽 경기장 시설 존치 요구
선수들 수송하던 리프트 관광용 케이블카로 개조
정상부에 관람용 데크, 매점 등 3층 짜리 건물 들어서



회색 케이블카가 설산을 타고 오른다. 직경 1.5m의 굵은 철탑은 일정한 간격으로 대지에 깊이 박혀 산정까지 이어져 있다. 시선을 탁 트인 설경으로 돌려 봤지만 이내 요란한 소리가 뒤쫓아왔다. ‘징징징징’ 금속 로프를 따라 울리는 마찰음은 골짜기마다 스몄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5년째 방치된 스키 슬로프를 따라 야생동물 발자국이 얼기설기 점선을 그렸다. 그 위를 케이블카의 그림자가 일정한 속도로 지나쳐 숲으로 사라졌다.

지난 1월 3일부로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 케이블카가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가리왕산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 스키 활강 경기가 열렸던 곳이고, 케이블카는 올림픽 당시 선수들을 실어 나르던 리프트를 개조해 관광시설로 활용한 것이다. 정부가 지난 2021년 6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정선군의 관광용 삭도 운영을 한시적으로 허가하면서다. 올림픽 직후 정선군 주민단체들이 경기장 시설 존치와 관광자원화를 요구하고, 점거 농성 등 물리적인 '행동'을 감행한 데 대한 협상책이었다.

관광시설 설치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해발 1,300m가 넘는 정상부에 2층 규모의 관람용 데크와 3층짜리 정류장 건물이 들어섰다. 원래대로라면 가리왕산은 2018년 올림픽이 끝난 직후부터 복원이 시작됐어야 했다. 당시 ‘올림픽 활강 경기장 건설을 위해 불가피하게 보호림을 훼손하지만 대회 종료 후 파괴된 자연생태를 전면 복원한다’라는 사회적·법적 합의를 우리는 기억한다.




시설 철거와 국유림 복원을 이행하라는 산림청 통보에도 불구하고, 관할 지자체인 강원도는 사후활용, 지역경제 활성화 등 단기적인 이용 가치를 거론하며 입장을 번복했다. 그렇게 복원 대신 개발과 방치가 이어져 오다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인해 슬로프 일부에선 산사태까지 발생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 아래에 줄줄이 보이는 회색 사방댐들이 산사태를 수습한 흔적이다.


가리왕산은 조선시대부터 왕실의 보호를 받는 '특별 구역'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100 여종의 희귀 식물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희귀 조류, 멸종위기 야생동물 수십 종이 서식하고, 원시림이 대규모로 분포해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바위틈으로 공기를 가두는 풍혈과 높은 습도 덕분에 독특한 토양생태계를 이루며 북방계 식물이 다수 관찰되고 내륙에서는 드물게 주목이 세대 별로 자란다. 1996년에는 산림청이 가리왕산 내 주목 군락지 65㏊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고, 2008년 그 범위를 2,475㏊로 확대해 보호해 왔다.


지난 2월 17일부터 3월 1일까지 해발 500~650m 높이의 슬로프 인근에서 무인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해 야생동물 촬영과 서식지 조사를 병행했다. 멸종위기종인 담비와 삵의 배변 흔적을 비롯해 너구리와 족제비, 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도달한 하봉 정류장 주변에선 고사 상태에 가까운 신갈나무와 주목이 관찰됐다. 높이 10m 정도의 토양을 깎아낸 산 정상부는 식생이 쉽사리 뿌리 내리지 못하는 자갈밭으로 변해 있었다.

엄태원 숲복원생태연구소 소장은 “생태계는 하나의 망처럼 서로 견고하게 연결돼 있다”면서, “자연에게 스스로 회복 불가한 정도의 상처를 주고서, 지금처럼 약속을 어기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미래 세대가 그에 따른 위기를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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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정선= 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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