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한 달이었다. 혹시 튀르키예에 있는지 걱정하는 연락이 밀려들었고, 나는 무사하다고 알리는 답장을 쓸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다. 그저 몇 년 스쳐 살았던 인연으로 "이 나라는 왜 이 모양이냐" 걱정한 게 방정이었을까,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우리보다 8배나 넓은 나라지만, 한 다리만 거치면 지진으로 무너진 집에 살던 이가 뉴스 속 익명이 아닌 '아는 사람'이 될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뉴스를 울음으로 가득 채우던 지진 소식은 조금씩 담담해졌다. 죽은 딸의 손을 놓지 못하는 아빠와, 잔해에 깔린 채 동생을 보호하던 누나와, 아기만 세상에 내보내고 죽은 엄마는, 재난의 익숙한 장면으로 보도 유통기간이 지나버렸나 보다. 집을 다시 짓는 데 몇 년, 도시를 다시 세우는 데 몇십 년, 죽은 가족을 잊는 건 평생이지만, 남의 나라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남의 일이니 말이다.
안타키아로 긴급구호를 갔던 우리 소방대원들도 돌아왔다. 구조소식을 전하는 뉴스화면 배경으로 돔 천장이 사라진 모스크와 옆으로 누워버린 첨탑이 보였다. 모스크를 지을 때는 시장과 학교를 함께 만드는 게 전통인지라, 모스크 주변은 하루 종일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중심지였다. 안타키아가 자랑하는 명물디저트 퀴네페 가게도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다. 실타래처럼 가느다랗게 자른 반죽 사이에 쫀득쫀득한 치즈를 넣고 구워서 달콤한 시럽을 듬뿍. 예상을 뒤엎는 맛에 눈이 똥그래진 나에게 "어때, 역시 맛있지?" 으쓱 엄지를 추켜올리던 아저씨의 가게도 무너졌다.
이미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기 시작한 도시. 여기 한번 살펴봐달라고 목놓아 구조대원을 부르던 이들도 이제 생환의 희망 대신 "죽은 자와 같이 죽을 수는 없다"는 옛 속담으로 맘을 다잡는다. 그래, 2,000년도 넘게 버텨온 도시가 이리 무너질 순 없지. 시내를 흐르던 강은 굽이굽이 지중해까지 이어지고, 그 끝의 항구에서 2,000년 전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전도 여행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싣고 온 물자가 모이는 실크로드의 종점, 지중해의 각 나라로 배들이 떠나는 항구였다. 베드로가 설교하며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탄생한 동굴교회도 안타키아에 있다.
지진에 버틸 철근을 법대로만 넣었다면, 기준 미달의 건축물을 슬그머니 허가해주지 않았다면, 그리 어이없이 사람이 자는 침대 위로 건물이 쏟아져 내렸을까? 선거 시점에 맞춰 내진설계를 지키지 않은 불법건축물을 '사면'해주며 "수십 만의 집 문제를 해결하노라" 당당히 연설했던 최고권력자. 인간이 어쩔 도리가 없다던 '자연재해'가 '인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인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버티어 내고자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 구조하지 못한 것도, 이런 재해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죄다. 지진에 대비한다며 수십 년 걷은 '지진세'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 내는 성금이 딴 주머니로 흘러가진 않을지 국민이 걱정하게 만드는 국가.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약속한 주거대출마저도 책임지지 않은 정부에 튀르키예 국민들은 어떤 마음일까? 몇 년에 한 번 가지는 투표권을 들고 "제발 제대로 일해라" 피를 토하며 협박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절박한 심정을 알기나 할까. 비단,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