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거짓말쟁이가 됐다. 작년 10월 말 그날 아침을 후회한다.
"예금 이자가 더 오른다며?" "이미 많이 오른 거 아냐?" "뉴스에서 더 오른다던데?" "있는 거 깨서 새로 들어가야 하나?" 물음표 가득한 60, 70대 여성 동료들의 대화가 마침표를 갈구했다. "기자가 잘 알지!" "그래, 그래." "맞아, 맞아."
추임새에 홀려 침묵을 깨고 말았다. "미국이 금리를 계속 올리고 있어서 한국은행도 올릴 거고 그러면 은행 예금 금리도 더 오를 거예요. 저도 연말까지 기다리려고요." 합리적 근거와 자발적 지침까지 곁들이자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 자리에 존재한 이유였던 설거지만 할 것을.
한 달 뒤 금융당국 수장들의 '수신 금리 과당 경쟁 자제' 발언이 잇따랐다. 당시 자금시장 경색이 예금 쏠림 현상으로 더 악화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수신(예금)과 연동된 여신(대출), 즉 가계 빚 부담 경감 명목의 당의정을 처방했다. 늑장 대응에 휘말린 정책의 실기를 '가격 변수' 통제라는 시장 개입으로 덮은 것이다.
예금 금리는 기다렸다는 듯 뚝뚝 떨어졌다. 그 속도에 놀랄 정도다. 급기야 기준금리보다 낮은 상품도 등장했다. "과도한 수신 경쟁 자제만 얘기했지, 예금 금리를 낮추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고"라는 최근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해명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예금자들은 손해 아닌 손해를 보게 됐다. "고금리 때문에 죽겠다"는 대출자들 원성에 대놓고 말도 못 한다. "이 와중에 돈 벌 생각인가"라고 되묻는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의 대꾸에 나도 할 말을 잃었다. 부동산·주식 열풍에 휩쓸리지 않고 실질 금리는 마이너스인 1%대 이자라도 착실히 모았던 예금자들은 "고물가 따지면 요즘 이자는 이자가 아니다"라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대출자들의 부담은 줄었나. 그렇지도 않다. 대출 금리는 찔끔 내렸다. 지난달 5대 시중은행의 가계 예대금리차는 오히려 전달보다 더 벌어졌다. 이자 마진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예금 금리가 빠르게 큰 폭으로 떨어지는 동안 대출 금리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내렸다는 방증이다. 예금 금리는 올리고 대출 금리를 낮추면 이자 마진은 줄어든다. 거칠게 정리하면 금융당국의 금리 개입은 예금자의 정당한 권리를 뺏고, 은행의 이자 장사를 부추긴 꼴이다. 만기와 종류가 다른 상품들의 비중 변화에 따른 결과라는 설명을 무력화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갈하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거듭하지만, 무릇 '은행 돈 잔치' 논란, '이자 장사' 비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급속한 고금리 상황이라 상대적 박탈감이 더 도드라졌을 뿐이다. 영업시간 정상화 거부 움직임, 갖은 사고와 추문 등 은행이 자초한 측면도 크다. 은행이 반성하고 고쳐야 할 부분, 여론이 분노하는 이유, 분명히 있다.
당국은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형국이다. 면허를 쪼개 은행 수를 늘리네, 배당과 보수 체계를 뜯어고치네, 금리 산정 구조를 손보네, 각종 궁리가 성급하고 어지럽다. 지금까지 못 한 일을 몇 달 안(6월이라고 한다)에 뚝딱 할 수 있을까. 금리 구조 투명화 외엔 의구심이 8할이다. 은행도 고객(이자), 주주(배당)의 이익이 중요한 상법상 민간 주식회사다. 공적(公的) 역할을 강조하려고 공적(公敵)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
은행 비판에 단골로 등장하는 "외환위기 때 은행을 살린 건 국민 세금"이라는 서술, 맞다. 다만 문장 속 '은행' 앞에 다음을 넣어야 적확하다. '관치가 죽일 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