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와 국경을 접한 우크라이나 서쪽 도시 르비우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그나마 안전한 도시'로 불린다. 러시아에서도, 격전이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아주 안전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온몸으로 전쟁을 겪어내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시내에선 전쟁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장례식이 매일 열린다. 울음 소리가 도심을 꽉 채운다. 도시 외곽에는 격전지에서 도망쳐온 피란민들의 임시 주택이 들어섰다. 고향과 집을 잃은 설움이 넘쳐난다.
한국일보는 16일(현지시간) 새벽 폴란드 남동부 도시인 제슈프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르비우에 도착했다(우크라이나에는 전쟁 후 비행기가 날지 않는다).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랑하는 관광지다. 문화 유산과 구시가지가 전쟁 중에도 대체로 잘 보존돼 있었다.
이곳 역시 전쟁터라는 것을 도착 직후 실감했다. 전쟁을 취재하는 각국 기자들을 위해 우크라이나가 마련한 '미디어센터'를 방문한 직후 공습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센터 관계자는 "문을 닫아야 하니 나가달라. 어서 대피소로 피하라"고 말했다.
'가장 가까운 대피소'인 근처 맥줏집 지하로 향하는 길. 트램을 비롯한 대중교통이 도로 한복판에 멈춰서 있었다. 공습 경보 땐 운행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피소엔 사람이 꽉 들어찬다.
러시아군 미사일이 이처럼 르비우마저 호시탐탐 노렸다. 막심 코지츠키 주지사는 16일 "중요한 기반 시설에서 미사일 공습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르비우 시청이 있는 도시 중심부는 오전부터 분주했다. 경찰차, 구급차가 집결했다. 오전 11시 시청 옆 개리슨 교회에서 르비우 출신 전사자들의 장례식이 예정돼 있었다.
장례식은 전장에서 사망한 영웅인 안드리 무라우스키와 발레리 골렌코우를 기리고자 르비우시가 준비했다. 두 사람은 모두 51세이고, 영토방위군 서부지역 125사단에 소속돼 복무하다 목숨을 잃었다.
무라우스키는 르비우 의대를 졸업했다. 치과의사로 일하다 전쟁이 터지며 자원 입대했다. 사격과 양궁을 좋아했다고 한다. 레슬링이 특기였던 골렌코우는 경찰이었다. 장애가 있었지만 전장으로 향했다. 그는 함께 복무했던 동생을 구한 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가족과 군인 동료들이 참석했다. 장례가 시작되자 두 사람의 시신이 담긴 관이 교회 안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울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을 모르는 시민들도 참석하면서 수백 명의 인파가 들어찼다.
장례식은 30분가량 이어졌다. 추도 음악과 기도가 반복됐고, 성수를 관에 뿌리는 의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바깥으로 옮겨진 관은 시청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리차키우 공동묘지로 향했다.
운구 차가 떠난 지 한참 뒤에도 시민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글랜코우를 애도하러 왔다는 한 군인은 "그의 아들과 군 복무를 함께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르비우시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을 위해 이렇게 연 장례식은 2월에만 17번이다(20일 기준). 거의 매일 누군가 죽어서 돌아왔다는 뜻이다.
르비우 외곽에는 교전 지역에서 탈출한 피란민들이 머무는 임시 주택이 들어섰다. 르비우가 수용한 국내 실향민은 누적 24만5,000명에 달한다(지난달 29일 기준). 여전히 15만 명이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일보는 르비우 남쪽 대형 스포츠 경기장 인근에 조성된 모듈형 임시주택촌을 찾았다. 공터에는 단층 또는 2층짜리로 된 컨테이너 건물이 꽉 들어찼다. 1,4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가 몇 명인지, 얼마나 노령인지 등을 기준으로 입주가 결정된다. 기준이 충족되면 신청 후 1, 2주 뒤 입주할 수 있다. 현재 70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이 중 200명 정도는 18세 이하다. 전기료, 난방비가 지원되고 기본적인 생필품도 제공된다. 하루 한 끼가 무료로 배급된다.
임시주택 관리자인 빅토르의 허락을 받아 내부를 둘러봤다. 건물엔 복도식 아파트처럼 층마다 20개 정도의 방이 있었다.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오븐 등이 층마다 비치돼있다. 시설이 좋은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화장실, 샤워실, 부엌 등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써야 한다. 한 가족당 방이 한 개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아 '개인 공간'을 누릴 수도 없다. 한 입주민은 "남은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이곳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다"고 했다.
사람이 밀려들면서 르비우의 집값이 올랐다. 전쟁 이후 많은 도시의 집값이 떨어지거나 과거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현지 부동산 업계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가격이 비싼 곳으로 꼽히는 수도 키이우의 원룸 가격이 평균 5만~6만5,000달러 수준(6,490만~7,788만 원)인데, 르비우의 원룸 가격이 80~90%대에 달한다. 르비우에서도 '돈'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빅토르도 전쟁 첫날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에서 탈출해 르비우로 도망쳤다. 그는 르비우에서 부동산 폭등의 심각성을 온몸으로 느꼈다고 했다. "오데사에서는 방 4개짜리 집 월세가 30만 원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60만 원을 내도 방 두 개짜리 집밖에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