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수도 키이우를 단번에 점령하겠다고 호기를 떨었다. 러시아군은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퇴각했다. 이후 양국의 격전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남동부의 헤르손·자포리자·루한스크·도네츠크 주(州)의 일부 또는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생명의 위협을 초 단위로 느끼며 산다. 지난해 9월 러시아가 합병을 선언했다가 우크라이나가 되찾은 헤르손에서도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12월까지 헤르손에 살다가 키이우로 이주한 애나(19)도 몸만 키이우에 있을 뿐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18일(현지시간) 키이우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애나는 "전쟁이 시작된 후 헤르손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보면, '작은 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군을 만나 살해당하거나 미사일 폭격으로 즉사하는 것이 그에겐 실존하는 공포였다. 방 안에 숨어 있느라 10개월간 외출한 게 10번도 되지 않는다.
애나는 큰 사건이 발생한 날짜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충격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지난해 5월엔 러시아가 인터넷을 끊었어요. 유튜브, 인스타그램 접속이 안 되더라고요. 우회로로 접속할 수 있었지만, 너무 느려서 계속 멈췄어요. 우리는 완전히 고립됐어요. (러시아의 헤르손 합병 선언 뒤인) 10월엔 러시아에서 휴대폰 '유심(USIM)'을 나눠줬어요. 우릴 감시하려는 용도라는 소문이 무성해서 사용하지 않았어요. (우크라이나의 헤르손 수복 직전인) 11월 초엔 러시아군이 전기, 물을 완전히 끊고 동네 집기를 다 훔쳐 달아났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헤르손에 사는 너구리들을 다 잡아갔대요."
애나는 "5월에 맡았던 '시체 태우는 냄새'가 아직까지 코끝을 찌르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인근 쓰레기장에서 났어요. 냄새가 일주일 동안 사라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러시아군이 죽인 우크라이나인들을 소각하는 냄새였어요…."
애나는 트라우마에 지지 않고 키이우에서 '새 삶'을 살고자 한다. 러시아의 무차별 공습으로 인한 희생자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헤르손에 비하면 '천국'이다. 그는 "여기서는 식료품도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친구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 약탈한 '평범한 일상'을 조심스럽게 다시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매일 감격한다고 했다.
애나는 "헤르손에 살 때 '성격유형검사'(MBTI)를 해 보면 '자신감이 없고, 무력하고,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점점 바뀌고 있다"며 기자에게 그간의 검사 결과를 보여줬다. 그에겐 새로운 꿈도 생겼다. "세상을 마구 탐험하고 싶다. 우크라이나 밖으로 여행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외국으로 가는 항공편이 거의 다 끊겼지만, 자신의 꿈은 누구도 끊을 수 없다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