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게임처럼" 장애아이 눈높이로 만든 앱... 그랬더니 모든 아이가 반했다

입력
2023.02.20 04:30


편집자주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과 구글, 종이 간판을 붙인 사무실에서 출발한 아마존. 빅테크의 시작엔 세련됨은 없었지만, 열정과 기백이 가득합니다. 시작은 미약할 수 있어도, 끝은 창대할 '창업의 기적'은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죠. 곧 유니콘으로 떠오를 수도 있는 유망 스타트업의 풋풋한 시작, 그 성공담의 프리퀄을 지금 실시간으로 만나봅니다.


[곧, 유니콘] 이수인 에누마 대표

어떤 스타트업은 스스로 등장하지 않고 세상이 불러내 성공의 길에 이르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정말 필요한 것인데도, 지금껏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을 시도한 곳이라면 특히. 세상은 그런 기술을 절대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이수인(47) 대표가 남편인 이건호 최고기술책임자(CTO)와 함께 2012년 창업한 스타트업 '에누마'(enuma)가 그런 경우다.

"특수교육을 받는 자녀를 위해 게임하듯 쉽게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우연히 우리 프로그램을 접한 미국인 투자자(마누 쿠마르 K9벤처스 대표)가 '투자하고 싶다'고 권유해왔죠." 그때까지 사업할 생각이 전혀 없던 그는 거절하고 돌아왔지만, 그 투자자는 몇 번을 더 만나 창업을 설득했다.

에누마는 그렇게 세상에 '거의 강제로' 불려나왔다. 첫 투자 권유를 받았을 때는 마침 이 CTO의 학업차 실리콘밸리에 거주할 때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10년. 에누마는 미국 본사 외에 한국·중국·일본·인도네시아에 지사를 두고, 직원 수는 100명이 넘는 에듀테크(교육과 기술을 합친 말)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작이 그랬듯 회사가 커지는 과정 역시 계획하지 않은 일의 연속이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이 대표에게, 먼저 다가온 세상의 관심과 함께 에누마가 성장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 게임
잘 할 수 있는 게 게임이라서, 게임을 떠올렸다.

이 대표 부부는 게임업체 엔씨소프트 출신이다. 미술을 전공한 이 대표는 게임 디자이너, 이 CTO는 개발자를 지냈다. 아이가 특수교육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이들이 장애아동을 위한 소프트웨어부터 찾아봤던 건 이 때문이다.

"어떤 서비스인지 보여주는 스크린샷이 쭉 뜨잖아요. 너무, 쉽게 말해서, 구린 거에요. 건강한 성인들이 몇 시간 즐기기 위한 제품에 몇백억 원씩 들어가는 것을 봐온 저희로선 어이가 없었죠."

인터넷 검색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비장애인만을 위한 콘텐츠만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게임 만드는 게 일이었던 이 대표 부부는 그래서 장애 있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기로 한다. 당시까지 많은 교육용 애플리케이션(앱)은 '이거 알려줬으니까, 알겠지? 풀어봐'라는 식으로 불친절했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게임 즐기듯 할 수 있는 앱'을 고안했다. 셈을 익히며 레벨을 높여가는 식으로 학습과 재미 두 토끼를 한꺼번에 잡게 한 에누마의 첫 제품 '토도수학'은, 이런 고민 끝에 나왔다.

장애아동을 위해 앱을 개발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쪽에서 반응이 왔다. 비장애인 아이들이 쉽고 재밌게 수학을 배울 수 있다는 이유로 토도수학에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그 덕에 미국·중국·한국 등 20개국 애플 앱스토어에서 교육 부문 1위에 올랐고, 구글로부턴 2016년을 빛낸 앱에 선정되기도 했다.

"장애아동을 위해 더 쉽게, 더 쓰기 편하게 만들었더니 모든 사람이 더 쓰기 편해진 거죠."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의 시선에 맞춰 개선했더니, 결국 모든 사람에게 편리한 앱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뒤 토도영어가 나왔고, 2021년엔 토도한글도 출시했다. 토도한글은 실생활과 밀접한 주제의 책을 읽어주면서 듣기와 읽기 능력을 동시에 발전시킨다. 애초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인데, 이 역시 한글을 익히고자 하는 영유아 모두가 즐겨찾는 앱이 됐다. "부모가 아이한테 동화책을 읽어줄 여유가 안 되는 가정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면서 유치원을 가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됐어요."


#2. 일론 머스크
에누마에 날개를 달아준 이름.

에누마는 어쩌면 운이 좋은 기업이다. 첫 투자를 받는 게 가장 어려웠다는 스타트업들이 많은데 에누마엔 그 기회가 굴러 들어왔으니까. "그래서 투자를 받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 처음만 쉬웠지, 이후엔 끊임없이 비전을 설득하고 증명해야 했단 얘기다. 장애아동 등을 위한 서비스로 시작한 터라 "그게 돈이 되겠냐"는 말도 적잖게 들었다.

그러다 에누마에 유명세를 달아준 계기가 찾아왔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총 1,500만 달러의 상금을 내건 스타트업 경진대회(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 참가해 2019년 공동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아프리아 국가 탄자니아에서 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5개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에 5개 기업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15개월 동안 이용하게 한 뒤, 프로젝트 시작 전과 후의 성적을 비교해 가장 학습 효과가 큰 프로그램을 만든 업체에 주는 상이었다. 첫 참가부터 시상까지 장장 4년이 걸린 장기 프로젝트였다.

이른바 '머스크가 후원한 상'을 받은 이후, 에누마는 임팩트 비즈니스(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업 모델)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수익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까지 창출하는 회사인 것이다. 임팩트 투자가 점차 벤처투자업계 화두가 되면서 에누마의 투자 유치에도 숨통이 트였다. 에누마의 누적 투자 유치액은 2,200만 달러(약 286억 원)에 이른다.


#3. 부모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 아이의 시선으로.

토도수학, 토도영어, 토도한글은 지난해에만 전 세계에서 180만 건이 새로 다운로드됐다. 누적 다운로드 건 수는 1,300만 건이 넘는다.

세 가지 대표 학습 앱을 기반으로 탄탄하게 성장해 온 에누마는 올해 초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영어·수학·한글·한자 등 4~9세 아이들에게 필요한 기초교육 프로그램을 담은 학습용 패드 '토도원'을 출시한 것이다. 이미 태블릿PC가 보급화한 시대에 굳이 별도 비용을 들여 구입해야 하는 기기를 내놓은 건 콘텐츠만 아이들의 시선에 맞추는 건 한계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에겐 패드가 생애 첫 기기잖아요. 그런데 태블릿PC와 앱스토어는 어른들한테 맞춰 개발된 것이라 아이들에겐 사용성이 떨어져요. 시스템 자체를 아이들의 관점에서 직관적이고 학습 효율을 높여줄 수 있도록 만든 기기가 필요하다고 봤어요." 이 역시 아이들의 관점에서 보고 만든 결과물이란 얘기다.

에누마엔 이 대표와 함께 게임업계에 몸담았던 이들이 많이 합류해 있다. 엔씨소프트, 넥슨 등의 개발자들이 에누마의 비전을 보고 10년에 걸쳐 한 사람, 한 사람씩 옮겨왔다고 한다. 이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스타트업에, 그것도 이제 갓 흑자를 내기 시작한 에누마에 합류한 건 이들 역시도 대부분이 부모라서다.

"저희가 게임 열심히 만들어서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 성공 역사를 쓴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온라인 게임 유행이 지나면서 우리 아이들에겐 보여줄 게 없어졌어요. 우리가 가진 기술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런 고민으로 뭉쳐 일하고 있어요."

장애 아이도 뒤로 처지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부모의 마음으로, 일도 놀이도 공부도 재미 있어야 시작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만들어 가는 콘텐츠. 이 두 가지가 바로 에누마의 성공 비결, 세상이 에누마를 불러낸 이유였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