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이 되려 한 죄'… 상폐 위기 몰린 페이코인 흥망성쇠

입력
2023.02.22 04:30
11면
[페이코인, 꼼수냐 혁신이냐]
실명계좌 확보 못 해 중단 위기 몰린 페이코인
당국 "수조 원 주조차익… 자금세탁 우려 커"
페이코인 "주조차익 아냐… 자체 공시 중"
전문가 "규제차익 기댄 사업의 한계점 시사"

특이한 코인이 있다. 이 코인은 다른 코인처럼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 있는 데다가 GS편의점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다. 국내 최초 결제형 코인인 '페이코인' 얘기다. 발행사인 다날은 페이코인의 탄생을 '혁신'이라 불렀다. 시장도 이를 인정한 듯 페이코인의 시가총액은 한때 12조 원에 육박했다. 이는 다날 시총의 20배가 넘는 규모였다.

하지만 이 코인을 두고 금융당국은 '꼼수'라고 판단했다. '수조 원에 달하는 주조차익을 올릴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당국은 페이코인의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를 불수리했다. 결국 양자 간 갈등은 법정 싸움으로 번졌고, 법원은 최근 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1년 넘게 이어진 갈등의 마침표가 찍힌 페이코인이 과연 혁신이었는지 그저 꼼수였는지 되짚어 봤다.

국내 최초 결제형 코인…"실명계좌 요구" 날벼락

페이코인은 2019년 4월 스위스에서 탄생했다. 발행사는 다날의 자회사인 페이프로토콜. 국내 가상자산 발행(ICO)이 금지되자, 다날이 스위스에 설립한 회사다. 페이코인의 발행량은 총 39억4,000만 개였고,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도 상장됐다.

1페이코인 시세는 상장 초기 100원 남짓이었으나 한때 3,000원을 넘어섰다. 1만 원짜리 물건을 살 때 필요한 페이코인 개수가 100개에서 시세 상승으로 3.3개로 줄었다는 얘기다. 페이코인만 있으면, 도미노피자·CU·교보문고·CGV는 물론 심지어 BMW도 살 수 있었다.

페이코인의 스텝이 꼬인 건 2021년 9월부터였다. 가상자산사업자에 대한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부과한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이 본격 시행된 직후다. 페이프로토콜도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를 접수했지만, FIU는 페이프로토콜에 '은행 실명계좌를 받아오라'고 통보했다.

실명계좌 확보에 실패한 페이코인

은행 실명계좌 발급은 현재까지도 가상자산사업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신고 요건이다. 특금법은 코인과 금전의 교환이 발생할 경우, 자금세탁을 방지하기 위해 가상자산사업자가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가상계좌)를 발급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사업자는 은행에서 받은 가상계좌를 고객에 부여하면서 코인 거래가 가능하도록 하는 구조인데, 달리 말하면 은행을 통해 가상자산에 '이름표'를 붙여오라는 요구다. 하지만 은행들은 자칫 자금세탁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로 발급에 보수적이다. 그간 수백 곳의 가상자산사업자들이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해 폐업해야 했다. 페이코인 역시 한 지방은행과 협상을 벌였으나, 루나·테라 사태·FTX 파산 등 악재가 겹치면서 발급에 실패했다.

당국의 우려들… "다날이 한국은행입니까?"

이 외에 당국이 우려하는 부분은 또 있다. 바로 자기발행 코인의 유통 문제다. 다날의 자회사가 발행한 페이코인을 다날의 결제망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페이코인은 마치 화폐처럼 기능했다. 즉 페이코인을 찍어내면 시세만큼 '주조차익'을 올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주조차익은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면서 얻는 차익인데, 페이코인의 발행이 한은에서 돈을 찍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금세탁도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애초 페이코인 발행물량은 39억4,000만 개인데, 이 중 현재 거래와 결제에 사용이 가능한 물량은 2억6,000만 개 수준이다. 여전히 발행물량 대부분을 페이프로토콜이 가지고 있는데, 이 중 상당수가 거래소를 통해 현금화된 뒤 로비자금이나 편법증여 등에 활용되더라도 현재로선 이를 막을 규제가 없다.

이에 페이프로토콜이 코인 20억4,000만 개를 소각한다고 발표했지만, 결제서비스 용도에 필요한 최소 물량을 초과한 물량은 여전히 자금세탁 가능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국은 발행물량의 약 1.5%(6,000만 개)만이 결제서비스에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기발행 코인을 실제 화폐처럼 취급하는 것은 건전한 시장질서·이용자 보호·자금세탁 방지 측면에서 우려되는 면이 크다"고 말했다.

페이코인 측 "우려에 공감… 주조차익은 아니다"

페이코인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페이프로토콜 관계자는 "페이코인에 제기된 각종 우려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대비책을 마련해뒀지만 규제 공백으로 인한 우려까지 사업자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소연했다. 발행사에 대한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사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체 공시뿐인데 당국이 이를 믿지 못하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막대한 주조차익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이 관계자는 "한은은 화폐를 발행하면 끝나지만, 페이코인은 이용자가 사용한 만큼 시장가로 다시 매입해야 한다"며 "발행원가과 액면가의 차익을 의미하는 주조차익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 속에 페이코인은 지난해 말까지 실명계좌를 확보하지 못했고, 당국의 신고 불수리 결정으로 이달 5일부터 결제 서비스를 임시 중단했다. 3월까지 실명계좌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코인 거래소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페이코인 측 관계자는 "당국 우려를 해소하고 실명계좌 확보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 "규제 차익에 기댄 혁신은 혁신 아냐"

전문가들은 페이코인이 규제 차익에 기댄 사업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천창민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페이코인의 장점은 나름 인정하지만, 국내 규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투명성·투자자 보호가 우려되는 측면까지 혁신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홍기훈 홍익대 교수 역시 "코인 발행량 중 실제 결제에 쓰인 물량이 극소수라는 건 결제 방식의 혁신이라는 페이코인의 순수성을 믿기 어려운 근거"라고 지적했다.

다만 정부의 과도한 우려가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박수용 한국블록체인학회장은 "정부가 블록체인 산업의 생태계 발전을 저해하고, 리스크를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어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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