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TV가 잘못됐나?" 직장인 김지석(42)씨는 12일 밤 SBS 드라마 '법쩐' 마지막 회 재방송을 보다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한국어 대사가 자막으로 떠 TV를 껐다 켰는데도 그대로였다. 김씨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랑 연결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TV 드라마에 자막이 나와 넷플릭스 보고 있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SBS가 일반 시청자를 대상으로 드라마 한국어 자막 서비스를 이달부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드라마 '천국의 문'이 1956년 전파를 탄 뒤 지상파 제작 역사 67년 만에 처음이다. OTT 보급화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드라마를 자막과 함께 보는 시청 습관이 새로운 표준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최근 2~3년 새 부쩍 세를 키운 OTT가 지상파 방송사가 반세기 넘게 이어온 드라마 송출 관행까지 바꾼 것이다.
SBS가 이달부터 자막 서비스를 시작한 대상은 '법쩐'과 '트롤리' 재방송이다. SBS 관계자는 15일 "OTT 드라마를 중심으로 이미 한국어 자막 서비스가 일상화되는 상황"이라며 "드라마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 드라마에 시험적으로 재방송에 자막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17일 방송을 앞둔 '모범택시' 시즌2도 재방송에 모두 자막이 달린 채 송출된다. 이미 K콘텐츠 시장에서 법정물 등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장르물 제작이 잇따르면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자막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드라마 자막 서비스가 시작되자 젊은 시청자들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자막 읽으며 보니까 더 잘 들리는 듯" "드라마 보기 훨씬 좋다" 같은 글들이 올라왔다.
다만 자막 서비스가 본방송으로 확대될지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 SBS 관계자는 "OTT와 달리 TV의 경우 자막 설정을 선택할 수 없고 일괄적인 자막 도입으로 인해 연출적 요소나 연기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어 자막의 본방송 반영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KBS와 MBC는 일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 자막 서비스 계획이 당분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도 자막으로 봐야 편하다'는 시청자 인식이 확산하고 있어 SBS에 이은 두 지상파 방송사의 자막 서비스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OTT가 바꾼 시청 표준으로 요즘 TV의 방송 문법은 급변하고 있다. tvN은 최근 교양프로그램 '알쓸인잡' 화면에 격자무늬 QR코드를 띄워 실시간 시청자 참여를 유도했다. '로또왕'과 '빨대퀸' 등 OTT 예능 프로그램에서 1~2년 전부터 먼저 선보였던 방식으로, 경품 등을 미끼로 본방 시청자를 사수하려는 방송사의 전략이다. TV 편성표도 OTT 콘텐츠로 점점 채워지고 있다. tvN은 지난 연말 티빙에서 처음 공개된 드라마 '아일랜드'를 이달부터 뒤늦게 내보내고 있고, 채널A도 지난해 12월 초 왓챠에서 공개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지난주부터 방송했다. '선(先) OTT, 후(後) TV'의 유통 흐름으로 전통 방송사업자들이 주도했던 영상 콘텐츠의 판세가 OTT 중심으로 확 기울고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TV와 OTT의 경계가 점점 무너지면서 콘텐츠 제작뿐 아니라 서비스 방식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것으로 보인다. 방송사와 OTT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한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지상파 드라마 회차가 12회로 줄어들었고 '재벌집 막내아들'이 주3회 편성을 하며 시즌제 예능이 많아진 배경엔 OTT를 통해 더 짧아진 콘텐츠 소비 호흡과 몰아보기 흐름이 깔려 있다"면서 "요즘 일부 OTT는 사용자를 더 잡아두기 위해 TV처럼 콘텐츠를 주 단위로 쪼개서 공개하고 있어 두 매체의 문화 혼종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