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로 사회 기반이 파괴된 가상의 근미래. 바이러스 항체 보유와 함께 젊고 건강한 신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변이된 신인류 '녹스'와 보통 사람 '큐리오'로 양분된 세계는 위계와 차별, 이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다. 국립정동극장에서 26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태양'의 원작 희곡은 일본 극작가 마에카와 도모히로(49)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2011년에 썼다. SF 소재의 연극이지만 희곡 집필 후 12년이 흐른 지금, 코로나19로 양극화된 사회를 사는 관객에겐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지난 12일 국립정동극장에서 만난 마에카와 작가는 "나뿐만 아니라 반세기 전 SF 장르물에서부터 수많은 작가가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절망적 미래를 경고해 왔지만 인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며 "놀라움보다는 비관적 미래를 예측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 대한 낙담의 감정이 크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마에카와는 '태양'의 한국 공연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발적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태양'으로 2011년 요미우리문학상 희곡상을 받았고 직접 연출을 맡아 요미우리연극대상 대상과 최우수연출가상을 받았다. ‘태양’은 2014년엔 일본 거장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 연출의 대극장 연극으로, 2016년 이리에 유 감독의 동명 영화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사회 혼란 속에 녹스는 인구 비중이 커지면서 정치·경제를 이끄는 주축이 되고, 사회 약자가 된 큐리오는 녹스 사회에 의존하며 그들과 공존한다. 하지만 우월적 존재인 녹스는 자외선에 취약해 밤에만 활동하는 치명적 결함을 지녔다. 생명의 근원인 태양을 등지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녹스는 밤을 의미하는 라틴어(Nox)에서, 큐리오는 골동품을 뜻하는 영단어(Curio)에서 따왔다.
마에카와 작가는 "대지진 후 사회의 위기 대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초토화된 사회를 다시 일으키려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부터 정립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태양'의 집필 동기를 밝혔다.
희곡 '태양'은 한국뿐 아니라 스페인, 러시아, 중국, 미국 등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그는 "어느 문화에나 여러 형태의 격차와 대립이 있어 이 작품에 공감하는 이가 많은 것 같다"며 "남북이 분단된 한국에선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마에카와 작가는 '태양'을 비롯해 인간 너머의 시선으로 인간성을 고찰하는 작품을 주로 써 왔다. 2005년 도쿄에서 초연한 초기 대표작으로 한국에서도 공연된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 역시 인간의 몸에 침투한 외계인이 인간 세계의 '개념'을 수집하는 이야기다. 마에카와 작가는 "어려서부터 요괴를 좋아했다"며 "SF든, 괴담이든 인간이 아닌 존재를 거울삼아 인간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신문을 만드는 경연이 있어 학교 괴담을 모은 '유령신문'을 만든 적도 있다"는 일화를 전했다. 그가 2003년부터 운영 중인 극단의 이름은 생매장이라는 뜻을 지닌 '이키우메'다. 그는 "'산 채로 저 건너의 세상을 바라본다'는 콘셉트로 사후 세계도 살아 있는 순간처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가볍게 한 작명이었지만 대지진 후에는 조심성 없는 단어 선택이었던 것 같아 후회스럽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준비하다 극작가로 먼저 데뷔한 마에카와는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다양한 콘텐츠 공급 플랫폼이 생겨도 연극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작품을 많이 접해 한국이 콘텐츠 제작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 연극계의 감각도 궁금했습니다. 이번에 '태양'만 관람하긴 했지만 한국 연극배우들의 신체 표현력은 정말 뛰어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