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걷히지 않은 우생학의 먹구름

입력
2023.02.16 04:30
26면
2.16 프랜시스 골턴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흔적은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도 발견된다지만 기원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낙인의 영향이 실로 컸다. 신앙의 도그마는 정서적 반감과 경제-사회-문화적 차별을 거리낌 없이 정당화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였다. 하지만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 토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대체로 불화해 온 과학, 엄밀히 말하면 진화론의 기괴한 변종인 우생학이었다.

우생학(Eugenics)이란 용어는 찰스 다윈의 배다른 외사촌인 영국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2.16~1911.1.17)의 1883년 논문 ‘인간 능력과 계발에 관한 탐구’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우생학을 “신중한 짝짓기를 통해 가축을 개량하는(…)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윈의 진화론, 특히 유전이론에 감응한 그는 부모-자녀들의 키 분포 조사라는 ‘통계학적 분석’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했고, 그 과정에서 백분율이나 표준편차, 회귀분석 같은 유의미한 개념들도 만들어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킹스칼리지 런던과 케임브리지에서 의학과 수학을 전공한 그는 수학과 통계학, 기상학 등 여러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기상도를 처음 고안한 것도, 지문 감식의 유효성에 처음 착안한 것도 그였다. 인종적 우열이 서구인, 특히 상층부 백인에게는 보편적 상식이던 당시 그의 우생학은 다윈이 짓밟아 놓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자신들의 우월한 혈통으로 얼마간 만회해 준 과학적 복음이었다.

아직 인류는 윤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파산한 학문인 우생학의 먹구름을 온전히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장애나 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생존권과 직결된 장애인 이동권에 극단적으로 인색한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발상에서도 저 먹구름의 흔적은 엿보인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