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일 오전 8시 30분 서울지하철 3ㆍ8호선 환승역인 가락시장역 승강장. 잰걸음으로 출근길을 재촉하던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다소 느린 걸음의 어르신들이 등장했다. 경비원 면접을 보기 위해 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빗은 노신사,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시장으로 향하는 노년의 여성, 친구 사무실에 콧바람을 쐬러 나온 할아버지까지. 지하철을 탄 이유는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만 65세 이상 무임승차’ 대상이었다.
# 이튿날 오전 9시 30분엔 지하철 4ㆍ7호선 노원역에 가봤다. 출근 시간이 지나 크게 붐비지는 않았지만, 노인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글학원에 가려 배낭을 멘 70대 여성은 당고개행 열차에 몸을 실었고, 학교에서 야간경비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60대 남성은 객차에서 내렸다. 한 70대 남성은 “공짜인 데다 버스보다 안전하고 약속 시간도 정확히 지킬 수 있는 지하철은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교통수단”이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가 논란이 된 지는 좀 됐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사안의 폭발력이 큰 ‘뜨거운 감자’에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새해 들어 기류가 달라졌다. 서울, 대구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무임승차 연령 상향 필요성을 선언한 것. 이들 지자체는 누적된 지하철 운영 적자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며, 공론화를 통해 무임승차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예상대로 표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정치권은 화들짝 놀랐고, 노인단체들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논쟁의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거리 민심’을 들어봐야 했다. 한국일보는 8~10일 서울에서 노인 거주 인구가 많은 송파구(가락시장역)와 노원구(노원역), 강서구(까치산역)의 환승역을 찾아 만 60세 이상 지하철 이용객을 만났다. 연령대가 치우치지 않도록 만 60~64세, 만 65~69세, 만 70세 이상으로 구분해 10명씩 30명의 의견을 종합했다. 인터뷰 대상도 경제활동 등 실질적 필요에 의해 지하철을 이용하는 고령층으로 좁혀 진행했다. 이들이 노인세대의 입장을 정확히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뚜렷한 흐름은 엿보였다. “연령 조정에 마냥 반대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노인 30명 중 23명(77%)은 어떻게든 현행 무임승차 제도를 바꿀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무임승차 가능 연령이 상향될 경우 혜택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큰 만 60~69세 노인(20명) 중에서도 14명이 긍정적 의견을 냈다. 적자만 쌓이는 지하철의 고질적 병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고령층 사이에도 형성됐다는 의미다. 까치산역에서 만난 윤정복(60)씨는 “서울지하철 적자가 수천억 원이라는데 이대로 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매일 지하철을 탄다는 김성삼(68)씨도 “재정 상태를 감안하면 제도를 손볼 시점이 되긴 했다”고 거들었다.
물론 반대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고령사회로 갈수록 노인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논리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민모(62)씨는 “중앙정부가 적자 부담을 지방정부에 떠넘겨 생긴 일”이라며 “서로 적절히 예산을 분담해 노인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모(65)씨도 “세금 낼 거 다 내고 무료혜택 받겠다는데 갑자기 없애려고 하는 건 너무하다”고 푸념했다.
제도 개선을 전제로 ①무료 탑승 연령을 ‘만 70세 이상’으로 높이거나 ②나이가 아닌 소득수준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물었다.
연령 상향은 23명이 찬성했는데, 100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노인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실제로 1981년 노인복지법 제정 당시 4%였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현재 15%를 넘는다.
찬성표를 던진 이들도 ‘순차적 조정’이나 ‘정년 연장 선행’ 등의 단서를 단 조건부 연령 상향(8명)을 선호했다. 까치산역 인근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성기(65)씨는 “정년이나 연금 문제와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법적 정년(60세)은 그대로 두고 무임승차 연령만 높이면 소득 없는 65~69세 노인의 타격이 크다는 우려였다. 최근 서울로 이사 와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을 본 지 얼마 안 됐다는 이모(68)씨는 “2년에 한 살씩 단계적으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소득수준에 따른 차등 지원책에는 찬반 의견이 비등했다. “선별적 복지가 효율적이고 소득이 있으면 교통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찬성이 12명,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고 낙인효과가 걱정”이라는 반대가 10명이었다. 김중신(78)씨는 “저소득층만 정교하게 가려내는 게 가능하느냐”고 고개를 갸웃했다. 노원구에 사는 박헌규(65)씨도 “차등을 두면 승강장에서 카드를 찍을 때 티가 나서 자존심이 엄청 상할 것 같다”고 난색을 표했다.
인파가 몰리는 출ㆍ퇴근 시간대에만 과금하자는 대안을 두고서도 “형편이 어려워 일을 나가야 하는 노인들에게 도리어 더 큰 부담”이란 반대 목소리와 “밀집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란 찬성 의견이 엇갈렸다. 무제한 탑승에서 ‘바우처’(정부가 일정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보조하는 복지 서비스)로 전환하자는 제언도 나왔다. 오동재(60)씨는 “형편에 따라 한도 있는 바우처를 지원하되, 원하면 기부나 반납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말했다.
주거지 인근에 지하철역이 없는 노인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서모(65)씨는 “월 한도가 있는 복지카드를 줘서 지하철ㆍ버스를 모두 탈 수 있게 해주면 접근성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