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과 채명신의 경고

입력
2023.02.09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세기 후반 최악의 전쟁으로 베트남전(1960~1975년)을 빼놓을 수 없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미군도 5만8,000명이 전사했다. 이 전쟁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수많은 유산을 양산할 만큼 국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보트피플이나 미군과 베트남 여성 간의 혼혈인 부이도이(Bui Doi)같이 베트남전에서 파생된 키워드들도 널려 있다. 종전 이후 베트남 엄마와 어린 아들의 생이별 장면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으로 재연되기도 했다.

□ 한국은 1973년 완전 철수할 때까지 연 31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이 시기 참전용사들이 떠나고 귀환하는 부산항은 이별과 상봉이 교차하는 뜨거운 현장이 됐다. 해병대 청룡부대(당시 2여단) 3대대 11중대가 치른 ‘짜빈동 전투’는 전쟁사에 남을 신화다. 1967년 2월 14일 오후 11시 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 24분 사이 월맹군 2개 연대 규모의 야간기습에 맞서 고작 1개 중대로 백병전까지 벌이며 승리한 것이다.

□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고(故) 채명신 장군은 대표적인 야전형 전쟁영웅이다. 그는 6·25전쟁 때 ‘백골병단’이란 한국군 최초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린 북한유격부대 총사령관(길원팔 중장) 일행을 몰살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채명신 장군 회고록(베트남전쟁과 나)을 보면 1965년 3월 어느 날, 청와대에 불려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투부대 파병 의중에 반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게릴라전에 정규군이 승리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르며, 상대는 20년 가까운 실전경험으로 세계 최강의 게릴라로 성장했다’는 이유였다.

□ 1968년 베트남 꽝남성에서 민간인 74명이 목숨을 잃은 학살사건이 당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됐다고 우리 법원이 지난 7일 인정했다.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당시 전쟁의 특수성에 비춰 민간인을 숨지게 한 건 정당행위란 정부 주장은 기각됐다. 게릴라전에 관한 국내 최고 전문가가 처음엔 파병을 반대했던 대로 세계 최강 미군도 베트남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채 장군이 박 대통령에게 파병을 반대하면서 설명한 또 한 가지는 ‘상대지도자 호찌민은 베트남인에게 반프랑스 독립투쟁의 국민적 영웅’이란 점이었다.

박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