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선물로 보낸 나전·장승업 그림, 127년 만에 러시아서 첫 공개

입력
2023.02.0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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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 
10일부터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 특별전

고종 임금이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 2세에게 전달한 ‘흑칠나전이층농’ 등 외교 선물이 러시아에서 열리는 특별전에서 127년 만에 처음 공개된다.

8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은 10일부터 열리는 특별전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에서 ‘흑칠나전이층농’을 비롯해 장승업 ‘고사인물도’ 2점, ‘백동향로’ 2점을 선보인다. 이 유물들은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1897년 2월 20일) 당시 고종이 니콜라이 황제 2세 대관식(1896년 5월 26일)을 맞아 민영환을 전권공사로 파견해 전달한 ‘외교 선물’ 가운데 일부다.

이번 특별전 전시 과정에서 고종이 전달한 선물은 모두 17점으로 확인됐다. 이 목록은 민영환을 수행해 대관식에 함께 참석했던 윤치호의 일기를 통해 일부가 언급된 바는 있지만 실물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선물들은 ‘19세기 조선 공예 및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흑칠나전이층농’의 경우, 고종의 특명에 의해 당대에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농 하단부에 나전 십장생(十長生)을 부착해 황제로 즉위하는 니콜라이 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점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1920년 일본에서 실톱이 도입돼 이후 나전공예에 ‘끊음질’ 기법이 유행했는데, 그보다 30여 년 앞서 ‘흑칠나전이층농’에 이 기법이 적용된 것으로 확인돼 공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끊음질은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잘라서 기하학적 문양을 만드는 기법이다.



조선의 4대 화가로 꼽히는 장승업의 ‘고사인물도’는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유물이다. 크렘린박물관 소장품 4점 중 2점이 공개되며 높이가 174㎝가 넘는 보기 드문 대작들이다. 작품들에는 ‘朝鮮(조선)’이라는 국호가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 서명 앞에 붙어 있다. 이 역시 장승업 작품 중 처음으로 확인된 희귀한 사례로 이 작품들이 ‘외교 선물’을 전제로 창작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동향로’는 사각형과 원형의 향로 2점으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한다.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치세를 뜻하는 대관식의 취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길상 문자를 기준으로 직선과 유려한 곡선을 조화롭게 융합해 정교하게 조각한 문양의 구조는 일반적 공예품에서 보기 힘든 복잡하고 세밀한 얼개를 보여준다.

이번에 공개된 유물들 가운데 ‘흑칠나전이층농’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20년 추진한 ‘국외소재문화재 보존·복원 및 활용지원 사업’을 통해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 복원예산을 지원해서 공개된 것이다. 재단 측은 “앞으로도 나라 밖 중요 유물의 발굴은 물론 나아가 원형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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