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씨 명학씨 오가던 옛길... 알고 보니 울릉도 명품 걷기길

입력
2023.02.08 04:30
20면
<192> 울릉군 내수전옛길과 북측 일주도로

“겨울에 폭설이 쏟아지지 않고 여름에서 가을 사이 태풍이 몰아치지 않는다면 그곳은 울릉도가 아닙니다. 눈과 바람과 파도가 섬을 만들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과 가슴을 다듬었습니다.” 포항에서 출항한 울릉크루즈 객실에는 지난해 발행한 ‘울릉문학’ 15집이 배치돼 있었다. 최수영 울릉문학회장의 발간사는 울릉도가 어떤 섬인지 단 두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겨울 울릉도는 눈의 나라

지난 2일 어스름한 새벽, 여객선이 도착한 사동항에는 그의 말대로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휴대전화의 실시간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흐릴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눈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흩날리던 가루눈은 도동항에 도착하자 싸락눈으로, 저동항으로 넘어가자 진눈깨비로 변했다가 일시적으로 솜뭉치같이 굵은 함박눈으로 쏟아졌다.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에서 일기예보는 대략적인 기상 흐름을 파악하는 참고용일 뿐이었다.

다행히 오후 들어 눈발이 그치고 예정했던 섬 여행에 나설 수 있었다. 일주도로로 웬만한 관광지는 쉽게 갈 수 있지만, 울릉도의 속살을 보기 위해 ‘내수전옛길’을 걷기로 했다. 울릉도에는 4개의 산길 트레킹 코스가 있다. 북면 석포마을에서 천부마을을 잇는 ‘석포천부길’, 나리분지와 알봉 외곽을 도는 ‘알봉둘레길’, 서면 학포마을에서 북면 현포마을을 잇는 ‘수토사길’, 내수전전망대에서 섬목까지 연결되는 ‘내수전석포길’이 조성돼 있다. 1882년 본격적으로 섬을 개척하기 시작한 후부터 일주도로가 조성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 주민들이 이용하던 옛길을 정비해 ‘울릉해담길’이라 이름 붙였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오가던 삶의 흔적이 남아 있고, 육지와는 다른 태고의 자연 생태를 간직한 길이다.

섬 해안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44.55㎞)가 완전 개통한 건 2019년 3월이다. 1963년 사업계획이 확정된 뒤 1976년 첫 삽을 떴지만, 공사는 하염없이 늘어졌다. 2001년까지 39.8㎞를 개설하고, 북면 천부리 섬목에서 울릉읍 저동리까지 4.75㎞ 구간을 완공하기까지 또 18년이 걸렸다. 이 구간 해안 절벽은 사람의 발길을 한 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선을 제외하면 산길만이 유일한 통로였다. 내수전에서 석포 구간은 그중 가장 오래도록 주민들이 이용했던 길이다. 흔히 ‘내수전옛길(3.4㎞)’이라 부른다.


옛길이 시작되는 내수전마을은 저동3리를 일컫는 지명으로, 옛날 김내수라는 주민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이라 하지만 실상은 가파른 산길 주변에 집이 몇 채 띄엄띄엄 흩어진 산촌(散村)이다.

해안에서 내수전일출전망대 아래 고갯마루까지는 시멘트 포장이 돼 있다. 옛길 트레킹도 이곳부터 시작되는데, 그날은 중간까지만 제설이 돼 있어서 눈길 오르막에서 트레킹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과장도 없이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으로 덮인 길이었다. 지난달 설 연휴 직후 24시간 동안 강설량이 70㎝에 달했고, 이후로도 간간히 뿌렸으니 흔히 보기 어려운 적설량이다.

정명학씨는 왜 이렇게 깊은 산골에 살았을까

“가는 데까지 가보입시다.” 가능할까 망설여지는데, 길동무를 자처한 이경애 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의 한마디에 힘을 얻었다. 다행히 기온은 영상이어서 길은 얼어붙지 않았다. 울릉도의 눈은 대체로 촉촉한 습설이다. 푹푹 빠져도 미끄럼은 덜한 편이다. 이런 날 눈길 트레킹에서 꼭 필요한 건 아이젠보다 발목으로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각반(스패츠)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출전망대 아래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드디어 시야가 확 트인다. 바로 앞바다에 작은 섬 죽도가 보이고 그 뒤로 무한 바다가 펼쳐진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꼈지만, 뭉게뭉게 농담을 달리해 신비로운 겨울 수묵화가 연출된다. 성인봉에서 흘러내린 능선과 골짜기는 더욱 선명하게 구분돼 근육질 설산의 매력을 유감없이 뽐낸다. 산등성이 곳곳에 나무 없이 하얗게 눈만 뒤집어쓴 비탈이 보인다. 깎아지른 언덕에 일군 밭으로 섬에서는 ‘깎기등’으로 부른다. 약초와 나물을 재배하는 귀한 땅이다.

경치 구경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은데, 내수전옛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올라온 만큼 내리막길로 이어지니 한결 수월하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한 1차 목적지는 정매화골이다. 내수전과 마찬가지로 사람 이름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내수전에서 석포마을로 가는 골짜기에 옛날 정매화라는 사람이 외딴집을 짓고 살던 곳이라 한다. 일부 설명문에는 ‘정매화’가 아니라 ‘정명학’으로 표기하고 있다. 주민들은 편한 발음으로 ‘정미야골’이라 부른다. 경상도식 발음으로 유추해보면 ‘정명학’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는 이효영씨 부부가 세 자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부부는 19년 동안 이곳에 거주하며 폭설이나 폭우에 조난을 당한 300여 사람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울릉군 개척 100주년을 맞은 1982년 선행 군민으로 표창을 받았다. 오가기가 수월치 않은 지형, 그러나 어떻게든 서로 연결돼야 살 수 있는 섬에서 인기척은 언제나 그립고 반갑다. 지치고 허기진 길손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것이 섬 주민에게는 몸에 밴 습관인 듯하다.





일출전망대에서 정미야골까지는 약 1㎞, 시멘트 포장도로는 중간에서 사라지고 길은 갑자기 오솔길로 변한다. 산비탈로 연결된 길이 폭설에 덮여 어슴푸레하게 윤곽만 잡힌다. 눈에 무릎이 빠지는 건 기본이고, 쓸려 내려온 눈이 덮인 일부 구간에선 허리까지 빠진다. 설상가상은 꼭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한 발 두 발 정미야골에 가까워지자 파도소리는 멀어지고, 계곡 물소리가 청아하다. 계곡에도 눈이 수북한데 흐르는 물은 이를 녹이고 길을 찾아 흐른다. 울릉도에선 사실 한겨울에도 계곡이 얼어붙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온통 설국을 이룬 옛길 주변에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동백나무를 비롯해 후박나무, 참식나무, 굴거리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푸릇푸릇하다. 잎 떨어진 활엽수는 송악과 마삭줄 등 덩굴식물이 휘감고 있다. 섬백리향, 만병초, 섬잣나무 등 한대성 식물도 함께 자라는 울릉도는 식물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정미야골을 지나면 다시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다시 바다가 보이고, 관음도와 닿을 듯 말 듯한 섬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울릉읍과 북면 사이 경계 표지판을 지나면 평지나 마찬가지다. 길가의 굵직한 나무 밑동마다 고로쇠물을 채취하려는 호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땅속에서 시작된 봄이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고 있다.




울릉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석포의 옛 이름은 ‘정들포’다. 눈물 짓고 왔다가 정들어 나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옛길 종점을 조금 남겨두고 다시 죽도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 한 채가 있다. 이재군·조연희 부부가 운영하는 ‘석포산장’이다. 주인이 항상 있는 게 아니라서 길손들이 손수 커피를 타서 마시고 잠시 쉬어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조씨는 가장 많이 구입하는 게 믹스커피라며 “돈을 안 내도 되는데 억지로 놓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정미야골 이씨 부부의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옛길이 끝나는 곳에 깜찍한 크기의 소형 굴삭기가 한 대 놓여 있다. 조씨 부부가 마당까지 가는 산길의 눈을 치우기 위해 구입했다고 한다. 눈 녹고 따스한 새봄에 걷는다면 내수전옛길의 정취와 풍광을 좀더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듯하다.

섬목부터 예림원까지 북측 일주도로

최수영 울릉문학회장은 울릉도를 ‘대한외국’이라 했다. 먼바다에 위치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국적 풍광이 더 큰 이유다. 눈길 속에 힘겹게 걸었던 옛길 아래로는 내수전과 와달리, 섬목 3개의 터널이 뚫렸다. 섬목터널을 통과하면 울릉도의 또 다른 비경이 펼쳐진다.

사람으로 치면 목덜미에 해당하는 섬목 바로 옆에 관음도가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는 동백나무, 후박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부지갱이나물, 쑥 등이 자생하는 생태의 천국이다. 2012년 섬목과 보행연도교로 연결하고 산책로를 조성했다. 입장료는 성인 4,000원, 약 1시간 30분이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폭설이 내리거나 바람이 심한 날은 들어갈 수 없다.




바로 인근에 수면에서 기둥처럼 솟아오른 삼선암이 있다. 울릉도의 풍경에 반해 하늘로 돌아갈 시간을 놓친 세 선녀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전설보다 신비로운 건 지질이다. 얼기설기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에 뿌리내린 나무도 불가사의하다. 최근에는 3개 바위 형상이 영화 ‘아바타2’에 등장하는 바위와 꼭 닮았다고 소문이나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현포리의 예림원은 박경원 원장이 가꾼 수목원이자 식물원, 조각공원이다. 겨울이어서 식물원의 매력은 덜하지만 전망대에서 보는 송곳바위(추암)와 코끼리바위(공암), 주변 바다 풍광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박 원장은 해양경찰로 울릉도에 들어왔다가 11년 전 이 땅을 구입해 눌러앉아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일궜다. 동굴 형식의 입구를 통과하면 아기자기한 연못과 폭포, 산책로가 미로처럼 이어진다. 그의 독특한 글씨 작품과 수묵화를 모아 놓은 작은 전시관, 야외 서예 조각을 감상하는 것도 이곳의 매력이다.

울릉=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