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재수(官災數)와 두부

입력
2023.02.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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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은 사주팔자에서 연유됐다. 생활 속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과 행동, 관습들을 명리학 관점에서 재미있게 풀어본다.

새해 들어 점(占)을 쳐 관재수(官災數)가 있는 사람은 대보름날 아침에 생두부 한 귀퉁이를 먹었다. 그러면 액운(厄運)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했던 시대에는 대보름날이 설날만큼 비중이 컸다. 이날 하루에 일 년의 세시풍속 중 오 분의 일이 행해졌다.('한국의 세시풍속') 현대에도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에게 두부를 먹이는 관습은 여기서 유래했다.

두부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중국 한나라의 회남왕 유안(劉安)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손자로 불로장생의 명약을 만들던 중 실수로 두유에 식용 석고를 떨어뜨려 두부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유안은 노장철학을 정리한 책 회남자(淮南子)를 쓴 도교의 대가이기도 하다. 두부 기원으로 유목민의 치즈 기술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두부를 백흘불염(百吃不厭)으로 '백 번 맛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칭송한다.

우리 문헌에서는 고려 성종 때 두부가 처음 등장한다. 당시 두부는 사찰(寺刹)에서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하던 음식이었다. 고려 왕실은 궁중 행사나 제향에 쓰일 두부를 만들 사찰을 지정했는데 이를 조포사(造泡寺)라 했다. 예전에는 두부를 '포(泡)' 또는 '두포(豆泡)'라 했다.

조선 왕실 역시 왕들의 능침 근처 사찰을 조포사로 지정했다. 그런 사찰을 조선에서는 능침사(陵寢寺) 또는 원당(願堂)이라 불렀다. 세조의 능원인 광릉의 봉선사(奉先寺)도 그중의 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두부 맛은 오히려 종주국인 중국을 능가했다. 명나라 황제가 "공녀인 조선 여인들의 두부 만드는 솜씨가 정묘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세종실록') 조선 두부의 질이 우수한 것은 능침사에서 제수를 마련할 때 특별히 신경 써야 했던 음식이 두부였기 때문이다. 또 왕실에 공상되는 두부의 응고제를 정부가 감독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두부가 왕이 종묘에 천신(薦新)하는 음식 중 하나여서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천신이란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을 먼저 신위(神位)에게 올리는 것을 말한다.

두부가 사대부가에 널리 퍼진 것은 조상의 제사상에 두부를 올리면서부터다. 이후 두부는 더 이상 불가(佛家)가 아닌 유가(儒家)의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사대부들은 두부를 오미(五美)를 갖춘 음식이라 했다. 맛이 부드럽고 좋음, 은은한 향, 색과 향이 아름다움, 모양이 반듯함, 먹기에 간편함 등의 오덕(五德)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두부는 귀한 음식으로 뇌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강릉의 유명한 초당 두부는 허균(許筠)의 부친인 허엽(許曄)이 삼척 부사 시절 강릉 앞바다의 바닷물을 간수로 처음 만들었다. 허엽의 호가 초당(草堂)이다. 허균 역시 음식 품평서인 저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한양) 창의문 밖의 두부가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며 미식가의 대를 이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도 최고로 꼽은 음식 중 하나가 두부였다. 그의 충남 예산 고택 기둥에는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위대한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라는 뜻이다.('조선의 탐식가들')

두부는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무골육(無骨肉, 뼈 없는 고기), 숙유(菽乳)로도 불렸다. 조선 왕실에서 임신한 왕족은 고기를 금기시해 대신 식전(食前)에 먹던 음식도 두부였다. 당시 두부는 서민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콩을 갈고 콩물을 짜는 데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구나 일반 백성들은 두부를 만드는 방법도 몰랐다. 설사 방법을 알아도 질 좋은 부드러운 두부를 만들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따라서 불교와 양반의 제례(祭禮)음식으로 순백의 귀한 두부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며 액운 방지의 음식으로 사용됐을 것이다. 관재수는 꼭 송사(訟事)뿐 아니라 구설, 시비 등도 포함된다.

전형일 명리학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