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철이다. 지난달 27일 2023년 상반기 검사 정기 인사가 발표되었다. 500여 명의 검사가 새로운 인사명령을 받았다. 기쁜 자도 실망한 자도 있겠으나 마음 부산하기는 매한가지다. 서둘러 기념사진을 찍고 재직기념패를 나누어 갖고, 펑펑 눈물을 쏟느라 송별사를 잇지 못하는 젊은 검사의 등을 두드려주며 능숙하게 손을 흔들고 새로운 임지로 떠나면 되는 일이다. 검사들은 대부분 2년이나 1년 단위로 자신의 인사철을 맞이한다. 올림픽보다도 월드컵보다도 자주다.
인사 발표 후 짐을 챙겨 떠나기까지 주어지는 시간은 대략 일주일이다. 임지는 전국을 무대로 결정되는 데다가 보통의 경우는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미리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던 업무라도 최대한 정리해 두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은 언제고 현재 진행형으로 밀려오고, 밀려오는 파도를 타며 사건들을 정리하는 틈틈이, 후임자를 위한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고 새로운 임지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면 짐 싸는 일은 늘 뒤로 밀린다. 전출식을 마치고 나서야 허겁지겁 짐을 싸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짐은 적을수록 좋다. 경력이 많은 검사일수록 짐을 최소화하는 이유다. 나는 어느 시점부터 임지에서 쓰는 가구들을 캠핑용으로 바꿨다. 새 임지의 숙소에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고, 캠핑 매트를 깔고 잔다. 불시에 인사 명령이 난다 해도 언제고 떠날 수 있는 진정한 프로 이동생활자의 자세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처음 가보는 지방의 검찰청에 도착하는 순간 신선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훅 하고 끼쳐온다. 범죄란 어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빚어진다. 낯선 풍경과 낯선 말씨와 낯선 방식의 음식 냄새가 범죄 속에 들어 있다. 이방인 검사는 최대한 빠르게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귓구멍과 콧구멍을 크게 열어야 한다. 오래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의 결을 겸손하고도 세심히 살피는 자세만이 이동생활자에게 한 시절 그 지역의 검사로서 올바르게 살아갈 자격을 준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이 지방을 알겠다 싶을 즈음, 그러나 그 익숙함이 완전히 몸에 익기 전에, 검사는 다시금 다음의 인사 명령을 받을 것이다. 검사가 이토록 자주 이동하도록 제도가 설계된 이유 중 하나는 익숙함에 대한 경계라고 한다. 너무 익숙해져서 보지 못하는 것들, 너무 친해져서 물렁해지는 마음에 대한 경계다.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 그 어디쯤의 긴장감이 검사를 꼿꼿이 서 있게 하고 눈빛 흐리지 않게 한다. '깊이 스며들되 끝내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 이동생활자 검사에게 주어지는 어려운 행동지침이다.
그렇다하더라도 2년이나 1년, 때로는 그보다 더 자주 짐을 싸고 근거지를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캠핑 매트에서 깨어난 아침, '여기가 어디더라?' 생각하게 되는 삶에서는 안정적인 인생의 계획과 설계 같은 것이 불가능하다. 어디라도 진득하게 뿌리를 내리고 매해 조금씩 다른 계절의 변화를 익숙하게 지켜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변화했으므로 이제 검사의 인사 주기가 조금은 더 길어지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변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그래서 유효하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지만 /내 두 발이 그리로 갈 때 /머리도 마음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박노해, '걷는 독서' 중)
지금의 근무지에서 맞이하지 못하는 봄날에 대한 아쉬움을 마음 한편에 접어 둔 채 새 임지로 향할 짐을 꾸리다, 문득 시인의 말이 눈길을 잡는다. 바쁘게 싸는 짐 사이에 머리도 마음도 챙겨 넣어야지. 이동생활자의 발바닥에 뻐근하게 힘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