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사달라"는 요구 거절하자, 보복이 시작됐다… '괴롭힘'에 시달리는 공무원들

입력
2023.02.02 00:10
15면
악성 민원인 위법행위, 4년 전 대비 180%↑
스트레스 등 정신질환 비율 전 직종 중 '1위'
"불법·탈법 민원, 반드시 법적 책임 물어야"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1. 서울시 한 자치구 소속 30대 공무원 A씨는 지난해 11월 40대 남성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노트북을 구매한 온라인 쇼핑몰이 소비자에게 불리한 반품 약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관내 운영 업체에 과태료를 물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A씨는 검토 후 “과태료 부과는 어렵다”고 답했다. 그때부터 이 남성은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 인신공격성 폭언을 퍼부었다. 그가 응대하지 않으면 상급자에게 ‘전화 폭탄’을 돌렸다. “행정 업무에 소극적”이라며 A씨를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하기도 했다. 그는 악성 민원에 두 달이나 시달린 탓에 우울감이 심해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A씨는 1일 “조직에선 ‘공무원은 공노비다. 그냥 참아’라고 한다”며 “공직에 괜히 발을 들여놨나 싶다”고 토로했다.

#2.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근무하는 ○○지구대.” 2020년 7월 20일 국민신문고에 이 같은 민원이 접수됐다. 사연은 이랬다. 사흘 전 부산의 한 술집에서 손님이 점주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B씨는 손님 C씨를 현행범 체포했다. 그러자 사건 처리에 불만을 품은 C씨가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B씨가 유흥업소와 결탁했다” 등의 음해성 민원을 수차례 넣었고, B씨는 이를 해명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생전 멀리했던 담배에 손을 댈 정도로 스트레스는 컸다. 안 그래도 한 달 전 발생한 관내 ‘독거노인 살인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멘털’이 약해져 있던 그에게 보복 민원은 결정타가 됐다. 그는 2주 뒤 목숨을 끊었다.

악성 민원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ㆍ신체적 피해를 호소하는 공무원이 늘고 있다. 일부 민원인은 대민 업무 담당자를 향해 이유 없이 욕설과 폭언을 하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물리적 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폭언, 폭행 등 민원인의 위법행위는 2018년 1만8,525건에서 2021년 5만1,883건으로 4년 새 180% 폭증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는 사회적 시선에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휴ㆍ퇴직을 하거나, 급기야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지경에까지 내몰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매 맞고, 욕 먹는 공무원’을 방치해선 안 된다”며 악성 민원인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문했다.

"평생 고통받아라" 분신 시도 민원까지

특히 대민 접촉이 많은 공무원들은 폭행ㆍ난동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지난해 12월 충남의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50대 남성이 “여권 사진이 이게 뭐냐”고 소란을 피우다, 이를 말리는 20대 새내기 공무원의 뺨을 때렸다. 해당 직원은 정신적 충격으로 병가를 냈다. 그해 11월에는 부산 한 주민센터에서 60대 남성이 공무원이 불친절하다며 분신까지 시도했다. 그는 범행 당시 “이렇게 해야 너희들이 평생 고통받을 것 아니냐”고 했다. 또 2021년 6월 서울 한 주민센터에서는 민원인이 “정부 양곡이 신청되지 않았다”며 17㎝짜리 흉기를 꺼내 팔과 복부를 자해했다.

그나마 이런 사례는 일회성이라 충격이 덜한 편이다. 공무원들이 꼽는 최고 악질은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공무원을 점찍은 뒤 신체적 위해 없이, 오랜 기간, 교묘하게 괴롭히는 경우다. 부산의 한 자치구에서 복지 업무를 맡고 있는 40대 D씨는 “대뜸 ‘이불이랑 구강청결제를 사오라’는 민원인 요구에 어렵다고 하자 그때부터 초과근무수당, 출장 관련 정보공개를 청구하거나 감사실에 진정을 넣고 사무실에 찾아와 비아냥거리는 등 반년 가까이 괴롭혔다”면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불면증까지 왔다”고 했다. 지구대 경찰관 E씨는 “난동을 부리면 공무집행방해로 체포라도 할 수 있는데, 국민신문고 등에 폭탄 민원을 넣거나 매일 전화로 시비를 걸면 할 수 있는 대응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들이 겪는 정신적ㆍ육체적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수도권 한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공무원 F씨는 “어느 날 혼자 ‘진상’ 민원인을 죽이는 상상을 하면서 웃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화들짝 놀라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센터 공무원 G씨도 “기초생활수급, 긴급복지 등 업무를 하면서 ‘욕받이’ 역할만 하다 보니 공직 생활 1년 만에 소화불량, 생리불순, 수면장애 등 각종 위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고 털어놨다. 실제 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중 우울증, 스트레스 등 ‘다빈도 정신질환’으로 진료받은 비율이 가장 높은 직종이 공무원(5만1,513명)이었다.

"폭행·협박 동반 민원엔 강경 대응해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지난해 4월 행정안전부는 민원처리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폭언, 폭행 등에 대비해 민원실 내 폐쇄회로(CC)TV 등을 설치하고 피해 공무원에게 심리치료와 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게 골자다. 이후 각 지자체는 민원담당자 보호에 필요한 조례를 제정하는 한편, 주민센터 등 대면 민원 업무가 많은 곳에 ‘웨어러블 캠(몸에 부착하는 카메라)’을 도입하고 있다. 민원인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차량용 블랙박스처럼 영상ㆍ음성을 촬영ㆍ녹음해 향후 법적 증거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공직사회에선 “정작 사건이 터지면 상부는 ‘쉬쉬’하는 데 급급하다”며 냉소적 반응이 더 많다.

때문에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공무원 괴롭힘에는 반드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하다. 오철호 숭실대 교수는 “지자체가 폭력적 방법으로 떼를 쓰는 악성 민원인에게도 온정주의 식으로 접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서 “민원 창구 등에 보안요원을 의무적으로 배치해 유사시 즉각 민원인을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민원 담당 공무원도 응대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오 교수는 “정상적인 상담 과정에서 공무원의 무성의한 태도, 설명 부족 등에 화가 나 악성 민원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주민 얘기를 경청하면서 왜 요구사항을 처리할 수 없는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 등을 차근차근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준석 기자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