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강하다.”
박영규 주피지 대사가 2020년 12월 부임 후 2년간 태평양 도서국들과 교류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한 13개 나라는 인구를 다 합쳐도 260만 명으로 경상북도 인구와 비슷하고, 국내총생산(GDP)은 94억 달러(약 11조6,000억 원)로 세계 152위 수준(2021년 세계은행)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제기구 내 영향력과 해양 자원 등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이 지역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달 7일 피지 수도 수바에서 만난 박 대사는 “현지에서 K팝 인기가 뜨겁고 피지 정부도 양국 간 직항편 재개를 요청할 만큼 관심이 많다”며 “관계를 돈독히 다질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주피지 대사관은 키리바시, 나우루, 투발루, 마셜제도, 마이크로네시아연방까지 5개국 외교공관을 겸임한다.
박 대사는 “기후변화 대응은 현지 외교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라고 강조했다. 태평양 섬나라들에 기후위기는 “생존이 걸린 당면 과제”이고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평양 생태계가 망가지면 한국 해양수산 분야도 타격을 입게 된다.
태평양 도서국들은 절박하게 지구온난화에 맞서고 있다. 피지와 바누아투는 2030년 재생에너지 100% 전환, 마셜제도는 2030년 온실가스 45% 감축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기후재난은 섬을 지키려는 분투를 번번이 꺾었다. 2016년 초강력 사이클론 ‘윈스턴’은 피지에 GDP 3분의 1에 달하는 14억 달러(약 1조7,000억 원) 규모의 피해를 안겼고, 2020년 바누아투에선 사이클론 ‘해럴드’로 주택 2만 채가 파괴됐다.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봉쇄로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기후변화 대응은 더 어려워졌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9~2021년 태평양 도서국 GDP 성장률은 5.4% 감소했고, 2020년 피지 경제는 17.2% 쪼그라들었다. 이에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외국 원조에 기대고 있다.
박 대사는 “재정 지원만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무엇보다 필요한 건 기술 지원”이라며 “풍력, 태양광, 해수온도차 등 신기술을 지원하고 전문성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도 힘을 보태고 있다. 현재 피지 2개 섬에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 중이고, 마셜제도에선 해수온도차 발전, 투발루에선 어촌 개발을 돕고 있다.
한국은 많이 늦은 편이다. 1970년대부터 이 지역에 진출한 중국은 2009년 이후 매해 1억~3억 달러(약 1,228억~3,700억 원)에 달하는 공적개발기금을 제공한다. 지난해 4월 솔로몬제도와 ‘중국군 파견’ 조항이 담긴 안보협정도 맺었다. 이에 맞서 미국은 지난해 9월 태평양 도서국 정상들을 수도 워싱턴으로 불러 회담을 하고, 8억1,000만 달러(약 1조4억 원)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군사ㆍ안보ㆍ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가 태평양 도서국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박 대사는 “14개 역내 국가는 유엔 내 아시아ㆍ태평양그룹의 4분의 1을 차지하면서 투표로 결정되는 사안이 많은 국제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태평양 항로는 3대 해상 무역로이고, 전 세계 참치 어획량 69%를 차지하는 수산 자원의 가치와 심해 광물의 잠재력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올해 태평양도서국포럼(PIF)과 첫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독자적 인도ㆍ태평양 전략도 수립했다. 박 대사는 “태평양 도서국들은 작은 영토와 부족한 자원에도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에 호감을 느낀다”며 “강대국들처럼 전략적 야심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