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이어 긴급조치 1·4호 피해자에게도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긴급조치 1·4호 피해자 A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 개헌 논의를 저지하기 위한 헌법 왜곡 또는 비방 행위를,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관련 단체의 가입 및 활동을 금지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조치였다.
A씨는 1974년 4월 긴급조치 1·4호 위반 혐의로 영장 없이 체포된 뒤 구속됐다. 이후 긴급조치 1·4호가 해제되면서 기소 없이 석방됐다. A씨는 2008년 옛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보상금 등으로 3,500여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경제적 배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법에 '보상금을 받으면 국가와 화해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법원도 긴급조치를 합법적인 대통령의 특별조치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010년과 2013년 긴급조치 1·4호가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으므로 위헌·무효라고 판단하면서 배상의 길이 열렸다. 헌법재판소 역시 2018년 8월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피해 배상은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민주화보상법의 '재판상 화해 간주'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A씨는 2019년 5월 국가를 상대로 1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A씨는 하급심에서 패소했다. 수사기관의 위법한 수사가 정신적 손해를 준 사실은 인정하지만, 1974년 8월 불법구금 상태가 해소됐을 때 손해를 인식할 수 있었고, 2008년 보상금을 받은 사실을 고려하면 손해배상 청구 소멸시효 3년이 지났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지난해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가 명백한 국가 작용"이라며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A씨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역시 "긴급조치 1·4호도 9호처럼 위헌·무효"라며 "법률적·제도적 변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던 만큼 A씨가 소송을 제기할 때까지도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어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구제를 실질적으로 보장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