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적고 물이 맑아 캠핑하기 좋다.' 강원 양양군 잔교리 해변을 방문했던 여행객들의 평가다. 지난 12일 찾아간 이 해변은 듣던 대로 고즈넉했다. 하지만 해변을 따라 조금 걷자 길이 좁아지고 가팔라지면서 발을 내딛기가 불편했다. 모래사장이 파도에 깎여 두 개 층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해변 안쪽에 위치한 캠핑장과 매점에서 불과 1m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침식이 진행돼 다소 위태로워 보였다.
강원도환동해본부의 2021년 연안침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잔교리 해변의 침식 등급은 심각(D등급) 수준이다. 잔교리 해변의 2021년 해빈(모래사장) 폭은 32.3m로 2010~2020년 평균 해빈 폭인 42.1m보다 9.8m나 줄었다. 해안선에서 육지까지 이어지는 모래사장의 직선 거리가 약 10m나 짧아졌다는 뜻이다.
해빈면적, 즉 모래사장의 총면적도 줄었다. 2010년 11월에는 3만683㎡였지만 2021년 11년 만에 다시 측정한 결과 2만4,537㎡가 됐다. 문제는 2011년부터 5차례에 걸쳐 해안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약 2만162㎡의 모래사장에 인위적으로 모래를 공급했는데도, 면적 감소를 막지 못한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의 피해는 저 멀리 섬나라만의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육지인 한반도에서조차 이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모래사장이 계속 깎여 나가며 해안선이 바뀌고 있다.
해양수산부가 2021년 연안 360곳을 조사한 결과 침식 상황이 우려(C등급) 수준이거나 심각(D등급)한 곳은 43.1%나 됐다. 매년 이 비율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최근 10년간 평균을 따지면 58.5%에 달한다.
해안침식의 직접적인 요인은 강한 파도다.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라는 지적이다. 김인호 강원대 지구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파도의 크기는 수심에 비례하는데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가 깊어지면서 강한 에너지의 이상 고파랑이 점점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잔교리 해변을 비롯한 여러 다른 해변이 깎여 나가는 것도 고파랑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변이 자연회복력을 잃은 것도 문제다. 원래대로라면 해변의 모래는 바닷물에 깎이더라도 파도를 타고 다시 돌아와 쌓여야 한다. 하지만 파도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한 번 깎인 모래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김 교수는 "동해안의 너울성 파랑 주기가 기존에는 3~4일이었는데 최근에는 약 15일 동안 지속되는 경우도 관측됐다"며 "이렇게 지속시간이 길어지면 모래를 더욱 먼 바다로 가져가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 쌓일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수심이 깊은 동해안은 침식 피해가 가장 심하다. 강원도 해안은 침식 등급 C·D인 곳이 차지하는 비율인 침식우심률이 2021년 72.0%다. 경상북도 역시 57.1%에 달한다.
동해 연안의 침식은 난개발이 겹쳐 더욱 빨리 진행된다. 관광지 개발이나 항구 건설, 발전소 건설 등으로 구조물이 더해지면서 2차 침식이 유발되는 것이다.
강릉 하시동 염전해변의 안인사구는 개발로 인한 침식이 의심되는 곳이다. 안인사구는 2008년 환경부가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사구가 잘 형성되지 않는 동해안에 위치한 데다, 최소 2,400여 년 전 형성돼 동해안 경관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라는 이유다.
그런데 지난 12일 방문한 안인사구에는 사람들의 진입을 막는 빨간 줄이 걸려 있었다. 최근 침식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구로 이어지는 도로가 아예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직접 바라본 사구 옆에는 아스팔트가 붕괴돼 모래에 섞인 흔적만 있었다.
하시동 주민 조석태(67·가명)씨는 "인근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약 3년 전부터 사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2018년부터 인근에 안인화력발전소 공사가 시작됐는데, 석탄운반용 접안시설과 방파제 등을 지으면서 모래의 이동통로가 막혔다는 것이다.
발전소 공사로 안인사구에 침식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는 2014년 환경영향평가 단계에서부터 제기됐다. 하지만 사업자인 강릉에코파워가 '침식 방지를 위해 양빈(모래사장에 인위적으로 모래를 공급하는 것)을 하겠다'는 보완계획을 제출하면서 사업 허가가 났다. 실제 사업자는 양빈과 침식저감시설 설치 등을 했지만 침식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환경부는 지난해 11월부터 뒤늦게 대책마련을 위한 연구에 나섰다.
서해안과 남해안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30년(1991~2020년)간 평균 해수면 상승은 서해안 9.2㎝, 남해안이 7.8㎝로 동해안(11.2㎝)만큼이나 빨랐다. 그나마 서·남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해수면 상승의 영향이 바로 드러나진 않지만 침식은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이달 초에는 인천 강화군 볼음도의 영뜰해변 침식으로 방풍림의 나무들이 쓰러진 것이 확인됐다. 해변의 서쪽에는 돌로 쌓은 제방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마을 주민들은 제방이 계속 무너지면 태풍 때 인근 농경지까지 바닷물이 찰까 우려하고 있다.
볼음도 주민 차주열(68)씨는 "모래가 깎이고 유실되는 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5년 전만 해도 섬 앞바다의 모래언덕에 그물을 쳐서 낚시를 했지만 모래가 다 사라지면서 그물을 칠 수도 없어졌다"며 답답해했다. 모래 유실로 밴댕이 등이 산란할 곳이 줄어들면서 어획량도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 차씨의 설명이다.
대책 마련을 위해서는 원인 파악이 필요하지만 정작 영뜰해변은 최근까지 정부의 연안침식 실태조사 대상에는 빠져 있었다. 과거 2003~2009년까지만 해도 조사대상이었으나 침식 상태가 B등급으로 평가받으면서 제외됐다.
해수부 관계자는 "예산이 한정됐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의견에 따라 침식이 심각한 해변을 위주로 조사대상을 바꾸고 있다"며 "영뜰해변은 올해부터 다시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안침식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만큼 실제 보이지 않는 침식 피해는 더 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박주희 인천녹색연합 사무처장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안 피해는 오래전부터 예상돼 왔지만 체계적인 모니터링과 대책 마련은 여전히 부족하다"며 "그동안 조사했던 지점 외 다른 해변에 대해서도 한 번쯤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