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를 넘어 몸통을 만나는 음악적 경험

입력
2023.01.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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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친숙하게 느낄 정도로 음악사 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청각적 인상이 워낙 강렬해 음악적 지식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귀에 쏙 박히는 악상이 특징적이다. '운명'이란 제목은 베토벤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안톤 신들러(Anton Schindler)에 의해 붙여졌는데, 교향곡 5번의 첫 모티브에 대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베토벤의 언급에 기인한다. 이 일화는 너무나 자주 회자되어 한편으론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교향곡의 핵심 철학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서사에 있다. 첫 악장을 c단조로 시작해 마지막 악장은 C장조로 마무리된다. 인간 존재의 나약함에 저항하며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베토벤 고유의 신념이 담겨 있다. 베토벤에게 c단조는 청년 시절부터 특히 편애했던 조성이었다. 운명의 불가항력이라는 미적 상징뿐만 아니라 실제 연주에서도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비올라와 첼로의 개방현이 C음이어서 현악기로부터 풍부한 울림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1악장의 시작만 기억한다. 운명 모티브의 유명세에 휘둘려 전체 교향곡의 맥락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악장에서도 음악적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유의미한 장면들이 만발한다. 특히 악장의 경계를 넘는 유기적 통일성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두 번째 악장에서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장면이 있다. C장조로 빛나는 순간이 펼쳐지는데, 마지막 악장의 주요 주제와 강한 결속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1악장에 등장했던 리듬의 씨앗은 3악장에선 호른의 단호한 음색으로 표현된다. 짧은 모티브로 전체 악장의 맥락을 관통하는 베토벤의 탁월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베토벤은 3악장과 4악장 사이 여백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쉼 없이 다음 악장으로 연결되는 순간을 음악용어로 아타카(Attacca)라 일컫는다. 3악장의 c단조에서 4악장의 C장조로 나아가는 동선은 크레센도의 극적인 상승으로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마지막 악장에서 베토벤은 승리의 행진곡을 배치시켰다. 이전 악장에 등장하지 않았던 악기들, 피콜로와 트롬본, 콘트라바순까지 동참시켜 음량도 늘리고, 음역도 확장했다.

피날레 악장 역시 첫 악장과 강한 결속을 갖고 있다. 1악장을 지배했던 고통과 두려움을 해소하고 모든 장벽을 부수는 열광의 순간이 전개된다. 이른바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는, 어둠에서 빛으로, 고뇌를 넘어 환희로 나아가는 베토벤의 전형적 서사는 이곳에서 청각적으로 완결된다. 4악장에서도 악장의 경계를 넘는 유기적 연결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3악장에 등장했던 주제가 또 한 번 출현한다. 이렇듯 음악 감상의 매력은 다시 등장한 주제를 인지하는, 그 변화된 모습을 알아채는 데 있기도 하다.

4악장의 코다는 전체 악장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순간이다. 베토벤이 작곡한 종결구 중 가장 긴 축에 속할 정도로 중요한데, 알레그로(Allegro)의 템포에서 아첼레란도(Accelerando)로 점점 빨라져 프레스토(Presto)에 이르는 극적 순간이 펼쳐진다. 쉼표와 번갈아 타격하는 으뜸화음의 강력한 에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격렬하게 폭발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첫머리 모티브로만 기억하는 것은 작품의 이름표만 얄팍하게 인지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머지 악장도 몰입해 들으며 음악의 몸통을 만나보자. 악장 간 경계를 관통하는 유기적 맥락을 깨닫게 된다면 감상의 지평도 그만큼 더 깊고도 넓어질 것이다.

(한국일보 홈페이지에서 음악의 링크와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