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직원을 자를 때 그야말로 인정사정이 없다.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하다 '해고 메일'을 받는가 하면, 이렇다 할 낌새도 없이 소속 팀이나 부서가 통째로 사라진 경험을 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
과거 미국의 한 투자은행(IB)에서 일했던 지인이 가장 놀랐던 건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해 주는 과정조차 없다는 거였다. 해고가 통보되는 순간, 전산망 접근이 막혀 하려야 할 수도 없단다. 고객 리스트를 포함한 내부 정보를 빼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지금부터 이 회사와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손대지 마시오. 당신 같은 직원을 데리고 있기 1분 1초가 아까우니 지금 당장 나가시오"란 말을 그 아무도 하지 않지만, 해고 통보를 받으면 딱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지인은 말했다. 회사를 떠날 마음의 준비 따윈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해고 과정이 그렇게까지 가차없을 일인가 싶지만, 이익과 효율의 '끝판왕'을 추구하는 나라인 미국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2019년 미국 주요 기업 대표들이 기업의 목적을 기존 '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직원과 고객 등 '모든 이해당사자의 번영 극대화'로 바꾸기로 했다지만, 여전히 미국은 주주 자본주의의 탄생지답게 기업을 운영한다. 기업의 수익성을 해치는 비용(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규모 감원 소식이 발표되면, 바로 주가부터 급등한다.
그런 미국에서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감원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1만 명)와 아마존(1만8,000명),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1만1,000명)에 이어 최근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이 1만2,000명을 해고한다는 방침을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통보했다. 알파벳만 해도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이다. 주요국 긴축과 경기둔화 여파에 경쟁적으로 몸집 줄이기에 나선 결과, 지난해에만 빅테크에서 '잘린' 직원 수가 6만 명이 넘는다.
이번 해고 칼바람은 현지에서도 이례적 규모로 평가된다. 최근 몇년 사이 잘나가는 빅테크에서 수억 원씩 챙겼던 엔지니어들도 출근길 해고 메일을 받게 될까 떨고 있다. 하지만 잘린 사람 걱정은 현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하는 듯싶다.
미국에선 해고가 쉽지만, 다른 직업을 찾을 기회도 그만큼 열려 있다. 일 못(안) 하는 직원은 설 자리가 없으니 생산성 낮은 좀비기업들도 퇴출이 빠르다. 생산성 높은 신산업과 기업, 새 일자리가 빠르게 그 빈자리를 채운다. 정교한 재취업 프로그램도 경력 단절의 틈을 오래 놔두지 않는다. 미국의 한 구인구직 사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해고된 노동자의 10명 중 8명은 구직 활동에 나선 지 석 달 안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경기가 어렵다면서도 미국 고용시장이 뜨거운 이유다.
고용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1990년대 후반, 당시 경험한 '대량 실직 사태'는 우리에게 여전히 극복하기 힘든 상처다. 미국의 '쉬운' 해고는 한국 사회에선 '잔혹 동화'처럼 들린다. 국내 대기업은 여전히 희망퇴직 같은 고비용 방식으로 인력 감축에 나선다. 하지만 고용의 유연성을 우리한텐 맞지 않는 옷이라고만 여겨온 건 아닌지, 실력보다 늘어진 경력만을 인정하며 오히려 고용시장의 숨통을 막아온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되짚어볼 일이다.